<단편소설>
1.
상위 1%의 VVIP를 빛나게 해 줄 그림자. 그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입가엔 잘 훈련된 미소가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번져 있다. 어떤 모욕에도 쉽게 흘러내리지 않을 견고한 미소. 나는 30대 커플 앞에 고급 포장지로 감싼 다쿠아즈와 하트를 띄운 바닐라라떼 두 잔을 내려놓았다. 행동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말투는 나긋나긋하지만 품위 있게, 걸음걸이는 조용하고 단정하게.
나는 고객 응대 매뉴얼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한 내게 ‘Very Very Important Person’이기 때문이다. 여자 고객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손가락을 펼쳐 잔을 들었다. 노동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손가락은 희고 가늘었다. 여자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왼쪽 손목에 찬 시계와 팔찌에서 빛이 눈부시게 흔들렸다. 그들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간단한 인사 외엔 말을 걸지 않았고 무례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건 품위나 예의 또는 친절의 종류라기보다 섞일 수 없는 계급의 분리를 의미했다.
은은한 빛이 대리석에 반사되어 라운지를 화려하게 감쌌다. 띄엄띄엄 놓인 테이블을 둘러보며 바 쪽으로 걸었다. 생상스의 〈백조〉의 선율이 우아하게 실내를 떠다녔다. 갑작스러운 생리통이 아랫배를 압박했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한 손으로 아랫배를 누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허 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급하게 예약이 잡힌 고객이 있어서 30분 안에 제품을 공수해 오라는 지시였다. 각각의 명품관에서 공수해 올 제품 리스트를 문자로 넘겨받았다.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퍼스널 룸 고객의 명품 공수 기회가 오다니, 가슴이 떨렸다. 계약직 만료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시기에 좋은 징조였다. 재계약을 위해 허 실장의 입김은 절실했다. 선애 언니의 다이어리는 내 인생을 바꿔 줄 최선의 카드가 돼 줄 수 있을까.
어긋난 관계에 방부제가 필요하다고 한 건 선애 언니였다. 음식이나 음료도 아니고 ‘관계’라는 추상성에다 방부제라니. 방부제 종류가 뭐냐고 묻자 선애 언니는, 카무플라주라고 알아? 하고 되물었다. 모호한 표정을 짓는 내게, 위장이나 변장을 뜻하는 프랑스어라며 신상 스카프를 목에 두르듯 매끄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관계를 유지하려면 위장이 필수라는 얘기야? 사회적 가면이라고 해도 될 걸 꼭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야 신선하다는 건지.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직업 탓이라 이해했다. 어긋난 관계라도 있어? 많지. 누군데? 선애 언니는 청바지 지퍼를 올리고 셔츠 위에 블루종을 걸친 뒤 유니폼 구두를 하이힐로 갈아신고 집어 들었다. 모두 샤넬 제품이었다. 넌 아닌 건 확실해. 명품으로 치장하고 명품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탈의실에서 나간 선애 언니는 그날 이후 중환자실에 누워 정지된 생을 이어 가고 있다.
직원 전용 통로를 이용해 뛰다시피 명품관으로 갔다. VIP 고객들이 명품관마다 쇼핑을 하느라 어수선했다. 1층 중앙 통로에선 4인조 클래식 공연을 하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고객들 사이로 클래식 연주는 불협화음처럼 떠다녔다. 백화점 입장에선 오늘처럼 휴무일에 VIP 고객들만 초대하여 이벤트를 여는 것이 일반 고객의 1년 실적보다 낫다고 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고객은 최상위 1% 고객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쇼퍼 룸에서 아니면 개인 집이나 호텔 룸에서 프라이빗 쇼핑을 즐겼다. 나는 명품관을 돌며 허 실장이 픽업해 둔 제품들의 리스트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화려한 고객들 뒤에는 언제나 유니폼 입은 직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이곳에서 그림자는 빛의 이면에서 빛을 더욱 빛나게 해 주어야 쓸모가 있었다. 의류 명품관을 돌며 슈트 케이스에 담긴 코트와 재킷 등 여러 벌의 의류를 인계받아 행어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