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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Oct 25. 2024

아르코창작선정작/위장의 기술6

<단편 소설>

   6.

  고객이 몸을 일으키자 허 실장은 재빨리 강아지 캐리어로 보이는 가방을 들고 왔다. 펜디 로고의 문양으로 장식된 캐리어였다. 허 실장이 캐리어를 열자 고객이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안으로 넣었다. 나는 진심으로 실수를 반성한다는 듯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등이 점점 부어올랐다. 허 실장은 발레주차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고, 고객은 상냥한 목소리로, 우리 공주님 집에 갈까요,라고 했다. 허 실장은 캐리어를 들고 고객의 뒤를 따랐다. 문을 막 나서려던 고객은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진열대에서 핸드백 하나를 집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기한테 감정 없는 거 알지? 자 선물! 


  고객은 탁자 위에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고객의 입가에 화려한 주얼리처럼 반짝이는 미소가 걸렸다. 반면 고객의 뒤에 서 있던 허 실장의 미소는 갑각류의 껍질처럼 단단했다. 그러나 고객 앞에선 순식간에 태도를 바꿀 줄 아는 허 실장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졌지만 간신히 참았다. 선애 언니의 메모에 수시로 등장하던 이중성. 어느 정도 상대해 볼 만한 자신감이 생겼다.  

    

  허 실장과 고객이 룸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휘청거리며 소파에 앉아 저린 다리를 주물렀다. 부어오른 손등이 후끈거리고 쓰라렸다. 탁자 위에 놓인 핸드백을 바라보았다. 뾰족한 징으로 장식된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자주 바뀌던 선애 언니의 명품 쇼핑백들이 떠올랐다. 허 실장의 리셀 심부름을 선애 언니가 도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선애 언니가 치장한 모든 명품은 인센티브 또는 어떤 대가를 치른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애 언니는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위해 위장은 필수라고 했다. 선애 언니의 그런 갈등쯤 나라면 잠시 로커 안에 처넣었을 것이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명품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둘러보았다. 다면 거울 안에 다양한 각도의 내가 담겼다.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인지 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VVIP 계층은 근본 자체가 점잖고 품위 있다는 소문은 그저 소문에 불과했다.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그들의 본능은 훨씬 과감하고 원색적이라고 했다. 선애 언니의 메모들은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들로 가득했다. 메모를 읽고 있으면 다양한 부류의 고객들을 실제로 마주한 듯 착각이 일 정도였다. 나는 다이어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면서도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핸드백 옆에 놓인 스테이크 접시를 바라보았다. 반 토막의 고기가 남아 있었다. 사르르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육질의 감각이 아직 혀끝을 맴돌았다. 소스가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육즙과 고기의 질감. 고기를 반으로 잘라 입안에 밀어 넣었다. 내 형편으론 결코 접할 수 없을 비밀스러운 맛이었다. 고기의 맛은 허 실장의 유혹적인 제안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허 실장은 내게 재계약 실패 이후의 향방에 대해 물었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선애를 퇴사 처리하면 티오가 날 텐데. 허 실장은 정직원을 새로 뽑을 때 자신의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은근히 과시했다. 나는 허 실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그건 내가 선애 언니 반대편에 서야 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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