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8.
허 실장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당장 벗지 못해!
허 실장을 바라보며 치아가 드러나게 미소 지었다.
명품이 안 어울리죠?
허 실장이 뺨을 때렸다. 아까보다 두 배의 힘이 실렸다. 한 손으로 얼얼한 볼을 만지며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선애 언니 며칠 못 넘긴다네요.
허 실장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뒤틀렸다. 나는 코트를 벗어 제자리에 걸었다. 이상하게도 선애 언니 죽음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스틸레토 힐을 벗어 제자리에 놓고 유니폼 구두로 갈아신었다. 갑자기 허 실장이 과장한 소리로 웃었다. 다면 거울 안에 담긴 허 실장과 내 모습이 마치 연극배우들 같았다.
내가 말한 건 생각해 봤니?
허 실장의 건조한 목소리가 잠시 흐트러졌던 감정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글쎄요.
허 실장은 자신이 채용한 직원의 참담한 미래를 떠올려 본 적 있을까. 선애 언니 사고에 죄책감이나 미안한 감정은 전혀 없는 걸까. 선애 언니를 찾아가 사과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는 것일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보다 나는 나의 이중적 감정에 더 화가 났다. 이 짧은 순간 선애 언니 걱정보다 나는 다이어리에 숨겨진 비밀을 두고 계산을 두드리는 냉혹감이 싫었다. 하지만 계약기간이 끝난 뒤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현실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에 더욱 화가 났다. 부조리한 저들의 탐욕과 나의 탐욕은 어쩌면 더없이 공평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몰랐다.
다이어리 가져왔지?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감정을 노출하면 지는 게임이었다.
선애 언니요, 사고 전날 저랑 술 마셨는데 그동안 그렇게 힘들어한 걸 몰랐어요. 실장님은 아셨어요? 사고 직전에도 통화했는데, 그날 만난 남자 고객의 취향이 아주 독특하다면서요?
그날 선애 언니는 퇴근하는 나를 일부러 기다린 듯했다. 저녁 대신 술이나 마시자며 이른 저녁 시간부터 바로 갔었다. 선애 언니는 취하기 전까지 자신의 얘기보다 내 얘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술이 취하자 울기 시작했고 적잖이 당황한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선애 언니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선애 언니는 말끝마다 너무 괴롭다, 힘들다, 죽고 싶다, 사는 게 더럽다, 등등의 말을 추임새처럼 늘어놓았다.
뭐가 그렇게 힘든지 속 시원하게 말을 해 봐, 울지만 말고.
말해 봐야 기분만 더러워져. 근데 딱 하나만 말할게. 너 정규직 되고 싶다고 했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허 실장 같은 1인자 쇼퍼는 무조건 피해라. 알겠지?
언니도 참,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무조건 되냐고!
에이 그래, 부자들 시중드는 게 싫으면 다음 생에 태어나야지 뭐. 부자로 말이야. 우린 꼭 부자로 다시 태어나자.
지금이 중요하지, 다음 생을 믿어? 죽으면 끝인 거지, 난 그런 거 안 믿어.
선애 언니는 미친 여자처럼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기다리며 선애 언니는 말했다.
너 있지, 나한테 건투 좀 빌어 줄래. 내일 난 꼭 해낼 거야!
뭘 해내는지에 대해선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요즘 자주 고가의 선물을 해 주는 허 실장의 1순위 고객의 프라이빗 쇼핑을 주도하나 보다 생각했다. 속으론 몹시 부러웠다. 선애 언니의 투정이 더 밉상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 투정을 받아 주지 않고 택시를 불러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선애 언니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사고 전 몇 번의 통화 끝에 내게 와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