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10.
나는 핸드백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라운지로 나왔다. 바 안으로 들어와 수정구슬 모양의 조명이 라운지 통로를 가득 채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명은 피로를 풀어 줄 듯 온화해 보였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 어둠을 배치해 서로의 비밀을 감싼 듯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비밀은 어둠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재탄생했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기침 소리마저 기품 있고, 이따금 작은 종소리처럼 울리는 고객들의 웃음소리마저 품위가 넘쳤다. 두 명의 여자 고객은 절제된 몸짓으로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그녀들의 높은 하이힐 굽 소리가 대리석을 경쾌하게 울렸다. 나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다. 그들이 곧 상식이고 신이다.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에서 내렸다. 탈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로커에서 평상복을 꺼내어 옷을 갈아입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자 구차하고 비루한 현실이 와락 달려들었다. 마치 위장을 위한 변장을 끝낸 기분이었다. 유니폼을 로커에 넣고 열쇠를 채웠다. 선애 언니의 로커는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날 선애 언니는 로커 아래에 다이어리를 빠트린 걸 몰랐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다이어리를 주운 건 행운일까 불행일까. 1층으로 올라와 명품관이 이어진 통로를 지났다. 명품관마다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객이 모두 빠져나간 백화점은 물고기가 모조리 사라진 수족관처럼 휑했다.
출입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색색의 불빛들이 밤의 거리를 화려하게 떠다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선애 언니를 위해 병원으로 가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백팩 안에 담긴 다이어리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내일이면 어떤 쪽이든 이 무게를 덜어내리라. 찻길을 건넌 뒤 백화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불 꺼진 건물은 야경에 묻힌 거대한 괴물 같았다. 날이 밝으면 마법의 성으로 바뀔 저 건물 안 어디쯤, 비밀 가득한 무한의 세계로 다시 발을 들이는 나를 상상했다.
밀린 월세와 대출금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엄마를 구해 낼 방법까지 해결될지 모른다. 어쩌면 선애 언니의 꿈처럼 파리나 밀라노 등으로 대신 유학을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동시에 사경을 헤매고 있을 선애 언니가 떠올라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짧은 순간 나 역시 가파른 절벽 위에 선 듯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떤 쪽이든 발을 내딛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선애 언니 핸드폰 번호를 꾹꾹 눌렀다. 보도블록 위로 길게 드러누운 그림자가 위장한 나인지 진짜 내 그림자인지, 운동화 끝으로 꾹꾹 짓뭉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