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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Oct 25. 2024

아르코창작선정작/위장의 기술9

<단편 소설>

  9.

  허 실장이 피식 웃었다. 긴장을 감추기 위한 위장을 너무 쉽게 드러냈다. 풍성한 웨이브 머릿결이 실크처럼 보라색 셔츠 위에서 출렁거렸다. 나는 한껏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날, 사고가 아니라 사건… 맞죠? 

  하아 너, 건방지게, 지금 딜을 하자는 거니? 좋아, 원하는 걸 얘기해 봐. 


  나는 다이어리에 적힌 정보들을 천천히 나열한 뒤 유령 새를 마지막으로 언급하며 정점을 찍었다.


  블루버드, 36세, 명품 한정판 리셀러이면서 유명 인플루언서라죠? 그날 실장님의 1순위 고객을, 한정판 보석을 미끼로 호텔로 불러들인 장본인. 

  메모를 토대로 한 그날 사고에 대한 나름의 분석이었다. 


  아까 두 분 연극 잘하시던데, 진짜 속을 뻔했잖아요. 


  허 실장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한정판 명품 구매 판로를 훤히 꿰고 있는 리셀러들과 실장님이 깊게 연루된 거 다 알아요. 


  희귀 한정판 명품으로 1% 고객들끼리 암투를 은밀히 조장하는 사람들. 악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애 언니는 VVIP 남자 고객들과 데이트는 물론 성적 요구까지 강요받았다는 메모는 충격이었다. 


  선애 언니는 요즘 유난히 고가의 명품을 자주 선물 받는 눈치였다. 아무것도 모를 때의 나는 선애 언니가 부럽고 배가 아팠다. 최상위층 고객을 다수 확보한 허 실장 보조라면 그 정도의 혜택은 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선애 언니가 허 실장의 부조리에 완벽하게 동참한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그날도 선애 언니는 무리한 요구를 받았을지 모른다. 선애 언니는 그날 호텔 룸에서 고객 한 명의 쇼핑을 위해 밤늦도록 퇴근을 못 한다고 했다. 마지막 통화에서 언니는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아 진짜 이따위 짓 더러워서 못 해 먹겠어. 


  이따위 짓이라니? 물었지만, 선애 언니는 혀가 꼬인 발음으로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퇴직금 받아서 프랑스 유학이나 떠나 버릴까. 패션은 아무래도 밀라노가 낫겠지? 


  언니가 그만두고 떠나면 티오가 생기고 나야 좋지, 제발 떠나 줄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쪽으로 와 주면 안 되냐는 부탁에 나는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나의 바람이 저주로 작용했던 걸까. 나는 나만의 죄책감을 다스리느라 자칫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장을 놓치고 민얼굴의 나를 드러낼 뻔했다. 


  선애 언니가 SNS는 잘 안 하는데, 메모에 집착하는 건 알고 계세요? 그것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상세히 묘사하는 버릇이 있더라고요. 


  허 실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거래되는 은밀한 위선들이 모두 밝혀진다면? 저토록 냉담하고 당당한 허 실장이라도 담담할 수 있을까. 허 실장은 생각에 잠긴 듯 길고 하얀 집게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데요, 실장님 말씀대로 모두를 위한 길이 뭔지 생각 좀 해 보려고요. 


  미래의 내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잠시 떠올렸다. 겉으론 무심한 척 말을 뱉었지만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감정을 숨길 때 마스크는 유용했다. 특히 선애 언니가 말한 카무플라주는 이 순간을 위해서 꼭 필요해 보였다. 허 실장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뒤 천천히 입을 뗐다. 


  보기보다 똑똑하네. 민주 씨도 알다시피 시끄러워지는 거, 잠깐이야. 이 세계는 복잡한 걸 싫어하고, 또 나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거든. 


  허 실장은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았다. 


  현명한 판단을 믿어. 비밀은 의외의 선물을 안겨 줄 때가 있거든. 


  허 실장은 풍성한 머릿결을 어깨 뒤로 넘겼다. 허 실장이 눈치채지 못하게 숨을 몰아쉰 뒤 거만을 위장한 채 말했다. 


  명품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선애 언니가 즐겨 사용하던 샤넬의 말을 인용했다. 


  가장 용감한 행동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거라죠? 


  허 실장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민주 씨가 뭘 원하는지 내가 모를까 봐? 그리고 명품 잘 어울리던데? 내일을 기대해 볼게. 어서 퇴근해. 


  역시 고수답다. 허 실장은 탁자 위 핸드백을 턱으로 가리키며 쇼핑백에 잘 넣어서 가져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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