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다가, 드라마 얘기가 나왔다.
“너네 <폭삭 속았수다> 봤어? 나 관식이가 딸한테 ‘힘들면 빠꾸해!’라고 말하는 장면 보고 펑펑 울었잖아.”
친구는 드라마 속 아버지의 그 말이 자기 엄마가 항상 해주던 말과 똑같다고 했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고, 늘 그렇게 말해줬다고 했다. 순간 나는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난 우리 엄마, 아빠한테 그런 얘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어릴 때 우리 부모님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준 적 없었다. 표현에 인색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그게 늘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당연한 줄 알았던 것이, 친구 얘길 들으니 문득 그런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게 너무 억울했다.
오래전 들었던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이 떠올랐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이라면, 더 노력해서라도 자녀에게 표현해 줘야 해요. 자녀들은 부모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요.”
애착 이론을 정립한 존 볼비(John Bowlby)에 따르면, 부모로부터 일관되고 따뜻한 정서적 반응을 경험한 아이는 안정 애착을 형성하고, 이런 애착은 아이의 자존감, 감정 조절 능력, 대인관계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사랑받은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는 법. 그렇다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기에 내 아이에게 사랑을 주려면 억겁의 노력을 해야 한다니... 한 번 더 억울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분하다고 가만히 있을 거야? 나도 우리 부모님처럼 무심하고 냉담한 부모가 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잖아.’
나는 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꾸마야, 엄마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엄마가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바로 너를 낳은 거야.”
“엄마, 갑자기 왜 그래? 나한테 뭐 잘못했어?”
처음엔 낯간지럽고 어색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할수록 이 말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신기하게도 말할 때마다 나 자신이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대리 치유’라고 부른다. 자신이 과거에 받지 못한 돌봄과 사랑을, 현재의 양육 과정에서 자녀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내면 아이가 치유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어느 날 김창옥 강의에서 들은 문장이 너무 좋아서 바로 아이에게 따라 했다.
“꾸마야, 너는 그냥 네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워.”
“엄마, 그거 지금 어디서 보고 따라 한 거지? 완전 티 나는데?”
표현이 서툴러서 티가 나면 어떤가. 결국 중요한 건 진심이다. 아이에게 노력해서라도 전달하려는 내 진심은, 언젠가는 꼭 통할 거라고 믿는다. 받지 못한 사랑이라도, 내가 노력해서 사랑하면 된다. 사랑 표현도 결국 배우면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