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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좋은 걸 허락하기로 했다

by 방송과 글 사이

“이거 진짜 고급 미스트래. 너 생각나서 하나 더 샀어.”

지난 명절 연휴에 친정 언니 집에 갔는데, 언니는 내게 줄 과일이며, 간식이며 바리바리 싸는 중에 잊지 않고 미스트까지 얹어주었다. “뭐 하려고 샀어?”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참았다. 언니의 고마운 마음을 잠자코 받았다.


‘이건 진짜 좋은 날에 아껴 써야겠다.’ 싶어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미스트를 곧장 서랍장 깊숙한 곳에 고이 넣어뒀다. 내 방 서랍장 안쪽 깊숙한 곳은 늘 그런 ‘특별한 날’을 기다리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 언젠가를 기다리는 각종 화장품, 액세서리가 있었다. 그 미스트 역시 그 대열에 조용히 합류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특별한 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날은 ‘아무 일도 없는 날 쓰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싶어서, 기분 좋은 날조차도 '이 정도 날엔 좀 과분한 것 같은데?'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 미스트는 결국 서랍장 안에서 꺼내보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항공사 포인트가 남아서 자기 주려고 핸드크림을 포인트로 샀어. 이거 유명한 거래.”

아직 내 것이라는 확실히 없어서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예쁜 디자인에, 부드러운 향이 전해졌다. 순간적으로 또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쁜 걸 내가 쓰긴 좀 아까운데, 누구에게 선물하면 좋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평소에 하지 않았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늘 좋은 걸 나한테는 허락하지 않아?’


순간 마음이 툭 하고 멈췄다. 이상하게 그 질문이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머물렀다. 나는 항상 그랬다. 좋은 걸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늘 다른 사람의 기쁨을 생각했고, 정작 나에게 좋은 걸 선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다 이번만큼은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남편에게 선전포고하듯이 말했다.


“자기야, 선물 고마워. 원래 다른 사람한테 선물할까 고심했는데, 이번엔 내가 쓸래.”


남편도 내게 선물한 거니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했다. 보란 듯이 핸드크림을 꺼내 손등에 짰다.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향이 부드럽게 퍼졌고,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지르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 선물이었으니까, 누구한테 다시 선물하지 않고, 내가 써도 괜찮았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Dr. Kristin Neff)는 ‘자기 연민(Self-compassion)’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이해와 친절을 자기 자신에게도 돌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긍정적 자기 보상(positive self-reward)을 통해 자신에게 건강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고, 이는 자존감과 삶의 만족감을 높이는 데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연구도 있다.




작은 깨달음 덕분이었을까. 서랍 속 깊이 잠들어 있던 미스트가 생각났다. 서랍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가볍게 미스트의 뚜껑을 열고, 얼굴 위로 부드럽게 뿌렸다. 투명하고 향기로운 입자들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기분이 좋아지면서 미소가 절로 번졌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야 썼을까?’ 싶었다. 미스트를 쓰는 그 잠깐의 순간이 남달랐다. 특별한 날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나에게 좋은 것을 허락할 때 그날이 각별해진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이제는 서랍장을 다시 열 때마다 조금 설렌다. 아직도 아껴둔 물건들이 충분히 좋은 걸 누려도 된다고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좋은 걸 아껴두지 않고, 먼저 나에게 허락하는 삶. 그건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하게 나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이었다. 지금 나는 나에게도 좋은 걸 당연히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작지만 큰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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