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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 Jun 09. 2019

에세이와 시3

“푸른 영혼에도 노란 봄이...”

퇴근길의 풍경은 이렇다.


아이폰 등장 이후 샐러리맨들의 신풍속도.


샐러리맨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그 길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물론 나 자신도.


  

타인이 작성한 글이나 사진, 그리고 동영상을 보고, 또는 음악을 듣는 것이 퇴근길의 일상사가 된 지도 오래다. 머릿속으로 심상을 떠올리고, 흥겨운 일을 생각하며, 창조적인 상상을 하기보다 타인이 작성한 디지털 콘텐츠를 무필터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 세계. 왠지 사람들이 영혼이 없어 보인다. 아니, 스마트폰이 영혼을 빨아들이는 기계든가.



아이폰의 스티브 잡스. 오늘날의 세계는 스티브 잡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스티브 잡스가 자녀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도 창조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인다.



타인의 콘텐츠에 절은 사고로는 결코 초신성 폭발의 파괴적인 창조도, 우주은하의 융합적인 창조도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영혼을 내면적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창조성을 외부로 드러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 “쉘 위 댄스”에선 단순 반복의 일상사에 지친 샐러리맨이 전철 차창 너머로 풍경을 보며 일탈적, 창조적인 나래를 편다. 바로 댄스다! 댄스는 그에겐 이 우주에서 저 우주로 건너가는 웜홀이다. 나도 그 ‘댄스’를 꿈꾸며 오늘을 산다. 그들을 관찰하며 스마트폰으로 에세이를 쓰거나 시에 대해 생각하며 ‘댄스’를 추는 나. 아마 드물지 싶다.



일본 영화 '쉘 위 댄스'의 한 장면. 댄스를 꿈꾸는 중년 남성의 샐러리맨들.


오래전 “퐁당퐁당 딱딱한 돌이 포근한 밤을 건너는 밤”의 저자인 친구를 만나게 된 데는 우연성이 크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과학을 전공했던 사람으로서 골수 서정 시인과 삶의 여정에서 교차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과 지하에서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의 동선은 지오이드 경계에선 영원히 교차될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차는 곧 ‘우주적 교통사고’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고 희귀하여 아껴야 할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람도 한 사람, 한 사람 우주와 같이 소중히 존중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와 관련해 저자와의 소중한 인연이 시작됐던 에피소드를 그의 시집에서 반기는 글로 수록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소개한다. 그에 앞서 친구와 나의 만남은 지상과 지하의 정신세계가 교차된 ‘일대 교통사고’였음을 밝혀 둔다. 다행히도 참사가 아닌 창조였음도 아울러 밝힌다.



반기는 글 #2


 "푸른 영혼에도 노란 봄이"     


지리산 초저녁 전경.


약 10년 전 사적인 일로 지리산 산청군으로 산중 생활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외딴 섬 같은 그곳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반전 영화 “지중해”를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족구와 배드민턴, 그리고 약수터까지 릴레이 달리기로 단체 대항의 삼겹살내기가 걸린 그곳, 평화롭고 조용하여 빨랫줄에 간혹 우담바라도 피는 그런 낙원이었다.



이탈리아의 반전 영화. '지중해'의 한 장면.


그런 분위기 속 특히 눈에 띄었던 친구가 있었다. 바로 지산(저자의 호)이었다 식사 시간 외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아, ‘고시낭인’이거나 증권가의 ‘작전세력’쯤 돼 보였다. 훗날 ‘시를 써는’ 친구인 사실을 접한 뒤부터 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몰두와 열중이 고시생들보다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시가 대체 뭐길래?”

사실 고시생들 사이에서도 지산의 집중력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집중력은 체력이 달린 고시 장수생들에게도 흉내 낼 수 없던, 아니 이미 지나간 한창 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문단의 세계를 잘 모르는, 골초 고시 장수생들에겐 심지어 이런 말까지 나돌았다.

"시 한 편 쓰는 데 저토록의 노력이? 시로 등단할 바야, 차라리 이 길을 가겠어!"

다들 하는 말이 "법 공부하길 잘했어"라는 것.     

생각건대, 참으로 지산은 별난 친구였다. 철따라 담근 과실주를 같이 먹자고 권하면서 그에게 물어 봤다.     

"네 꿈이 뭐냐?"     

그때 지산이 한 말이 지금까지도 기억난다.     

"측천무후 이후 단절된 불교 시 장르를 재건할 거야."     

다부지면서도 결의에 찬 모습에, 순간 저 먼 산을 바라보며, 그냥 그쪽으로 걸어가고 싶었던 적도 있다.     

하여 떠올랐던 생각이,     

'산중에는 별의별 사람도 다 있으니 조심해야겠다.'     

그러고는 나의 산중 일과 스케줄대로 약수터로 뛰어갔다. 이번 삼겹살내기에서 진 것도 그 한 이유였다.     

그 뒤 지산의 떠돌이 유랑생활과 시를 쓰게 된 연유를 알고선 할 말이 없었다.     

     

한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 여인의 칼 같고도 얼음장 같은 말 한마디로 '퇴자'를 당한 것이었다(여기엔 저자의 한 많은 사연이 있지만 밝힐 순 없다). 순간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곱추”의 주인공 콰지모도가 떠올랐다. 참고로 노트르담의 성당은 최근에 불타 버렸다.     


이후 15년의 세월 동안 방랑하며 그녀에 대한 사랑의 아픔으로 시를 써 내려가며 내적 상처를 치료했던 것. 덧붙여 말하면, 뒤에서 소개될 시들은 좀 날카롭다. 이 정도면 '한 여인을 사랑할 자격은 충분히 있는 사람'. 감히 단언컨대, 그 여인은 정말 진실한 사랑을 받은 터라 행복한 사람이 분명하다. 이로부터 지산의 유랑생활은 막을 올리고, 보석 같은 시들이 탄생한다.


자문해 본다. 한 여인을 무한히 사랑했지만, 그와 같다면, 20년을 유랑하며 시를 쓰고 생활할 수 있을까? 사랑, 이별, ‘심장의 미어짐’. 영화 “선리기연”에서도 잘 보여주듯,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선 '심장'을 검증해야 하는데, 저 친구의 '심장'을 볼 수 없으니, 자하처럼 그녀에 대한 사랑의 진위를 난 알 길이 없다.



선리기연에서 자하가 지존보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


돌이켜보면, 지산이 시 쓴다기에 산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장난을 쳤다. 즉흥시 시제를 주면서 약을 올린 것이다. "2시간 안에 쓸 수 있냐고". 그렇게 탄생한 시가 '전설의 고향' 등이다. 여하튼 지산의 시에 대해 무한한 기쁨과, 사뭇 안도의 마음을 갖는다.


파일 속에 15년간 봉인되어 있던 시가 이제야 종이에 싹을 틔워 세상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난 이 한 이름 없는 시인의 시를 아낀다. 그의 시는 그야말로 지금의 시대에선 찾아볼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촛농처럼 녹아 흘러내린 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시들은 지산의 분신이며, 혼 자체이다. 그의 시가 세상에 선보인 것을 환영한다.

 

앞으로도 지산의 시를 더욱더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의 마음도 늦추지 않으면 안 된다. 지산의 시는 강렬한 고독. 깃발 같은 절렬함. 애를 녹이는 시들로 담배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경고 문구라도 내걸자면, "지산의 시는 폐암보다 무서운 고독병을 유발합니다! 그래도 읽겠습니까?" 그의 시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추출된 만큼, 나 또한 축시로 화답한다.



어느 밤의 달


That Moon will lay a yellow carpet in the sea!

박명에 저쪽 바다는 뜨겁다

힘을 잃은 달은 기운도 없다

사이엔 눈물을 머금은 비너스     

     

달이 그리니치자오선에 낚였다

바다는 해를 낳으려 분주하다

사이엔 입술을 연 수평선     

     

빛이 몰려온다

지워지는 달은 그려지는 해에

無言을 광속으로 전한다     

.......     

     

어느 봄날, 海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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