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몬 Jun 09. 2019

에세이와 시4

"사람마다 인생길이 다른 것처럼..."

집으로 가는 길이다.


버스에서 본 귀향길. 뒤로 달린다.  따라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차창으로 흐린 피사체들이 뒤로 달린다. 피사체들의 즐거운 뒤달리기다. 그 뒤달리기로 난 집으로 갈 수 있다. 피사체들이 그간 단 한 번도 충돌하지 않고 뒤달리기한 덕분으로 난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마치 극장에 들어가 좌석에 앉으면 영화 필름이 되감기고, 마침내 종착신 "the finale"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무사히 뒤달려 도착, 그런 의미에서 난 피사체들에 대단히 감사하다.

     

반면 피사체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나와 피사체는 지금, 이 순간, 동시에 같은 입장이다. 이 둘 중 누가 옳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상대성 원리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상대성 원리를 사람에게 적용하면, '역지사지'일 듯 싶다. 최근 중장년 층이 회사의 청년 세대를 대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는 추세이다. 그와 관련해 경제학의 기본 전제인 '사람은 합리적, 이성적 사고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나만의 데카르트적 회의를 가져 본다. 특히 '최소 비용, 최대 효과'에 대해서도. 19세기의 낡은 사고다. 물론 지금도 이 사고에 젖은 사람들은 많다.


     

경제학의 기본 전제인 희소성의 원리. 19세기의 대표적인 합리적 사고.


그중에는 오늘날 20~30대 청년 종업원들을 고용한 뒤, 일종의 '멘탈 붕괴'를 겪는 사람도 있다. 갑자기 머릿속에 《비유클리드적 파리의 비상에 곤욕을 치르는 당나귀》가 떠올랐다.


비유클리드 파리의 비상에 곤욕을 치르는 당나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그 원인을 '최저 임금'과 '주 52시간제'로 보고 있다. 난 데카르트적 회의론에 입각해 다른 이유도 생각해 본다. 이런 성격에 내 주위의 사람들이 늘 피곤해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의 청년들은 AI 알파고가 바둑의 최강자, 이세돌과 커제를 이기고, 중력파의 발견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이 입증된 것을 목격한 이 시대의 주인공들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증거인 중력파. 중력파는 시공간(녹색그리드)에 이는 잔물결과 같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AI(인공지능)와 일반상대성이론의 입증이라는, 소위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적 패러다임의 대전환과도 같은 시대적 사조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고용주의 '최소 비용, 최대 효과'에 대해서도 청년들은 다음과 같은 상대론적 사고관을 가졌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첫째. 나는 사람과 상대되는 로봇이 아니다. 최소 비용, 최대 효과는 기계론적 사고관이며, 따라서 로봇,기계, AI에 적용할 일이다.     

     

둘째, 고용주 입장에서는 '최소 비용, 최대 효과'이겠지만, 근로자인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최대 임금, 최소 근로'가 상대성 원리와 합리적 인간관에 따르더라도 당연한 일이다 .


고용주가 그런 청년을 이상히 여긴다면, 오늘날엔 일종의 갑질 고용주로 매도될 듯 싶다. 핵심은 상생이고. 상생은 타협을, 타협은 양보를 전제로 한다. 이게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할 방법이지만, 20세기의 주역인 고용주들이 상대론으로 무장한 청년들의 사고방식을 따라가기가 버거운 것도 현실.


결론은 나 자신도 청년을 대할 때 의식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 청년들과의 조화로운 생활을 상상하며, 꼰대 탈피에 도전해 본다!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나의 데카르트적 회의가 끝날 무렵 집에 도착했다. 식구들은 저마다 각자의 일로 바쁘다. 얼굴 보기도 힘들다. 요즘 건강 문제 때문에 홀로 운동에 나섰다. 한적한 호숫가를 돌며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에 담다가 카페에 앉아 《퐁당퐁당 딱딱한 돌이 포근한 밤을 건너는 밤》의 마지막 번째 반기는 글을 읽어 본다.


호숫가에 핀 이름 모를 꽃. 

동생이 오빠를, 지인이 친구를 축하해 주는 프롤로그다. 글은 시간이 지나면 임팩트가 사라진다. 호수에 던진 돌로 생긴 파동이 시간이 지나 점차 사라지듯. 하지만 진심과 공감, 즉 영혼이 담긴 글은 시대를 초월한 임팩트를 준다. 그들의 소박한 글을 읽고 난 소감이다. 여기서는 잠시 티 타임을 가진 뒤, 그들의 반기는 글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지리산 감로차. 오랜만에 차 한잔을 즐기는 여유.


반기는 글 3     

사람마다 인생길이 다른 것처럼...     


그 사람의 길이 옳다고, 그르다고 논할 순 없습니다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이 시인은 정말 인생이 굴곡지고,

아픔도 많구나, 라는 느낌이 옵니다.     

하지만 아픔이 그 사람의 내공에 더 깊이,

깊숙이 파고든 것 같지만,

이젠 그 아픔까지 삶의 동반자로 만든 것 같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인생과 걸어 온 삶을

뒤돌아보게 됩니다.     

필름처럼 지나가 버린 나의 삶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지나가지만,

그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남지만,

나는 또 다시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지요.     

그러니 시인님의 아픔으로 인해 이런 좋은 글귀를 보고,

진심의 마음을 느끼니, 이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습니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_ 동생 정혜    

     

그것이 지산의 詩다!     

지산의 詩는 뭔가를 의도해 쓴 글이 아니다

특정한 누군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쓴 글도 아니다

또 뭔가를 이루려 쓴 글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면서, 손에 연필이 있고, 종이가 있으니

써내려 간 글이다

그래서 마음이 뜻이 되고, 뜻이 생각이 되고

생각이 언어가 되어

글로 지산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그것이 지산의 詩다!     

_ 정천 지성욱 

     

외로움의 조각들     

지금 세상은 메마르고 목말라 있다.

지산의 시는 지금의 목마름과 메마름에

비를 내려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외로움을 표현하는 하나하나의 구절마다

지산의 세월이 녹아 있다.

방황에 또 방황, 그리고 떨쳐 버릴 수 없는 외로움의 조각들.

사실 이러한 메마른 외로움들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산의 시는 이글스의 호텔캘리포니아를 연상케 한다.

지금도 그의 시를 읽으며, 담배 연기를 뿜으며,

그의 숨결을 되새김질해 본다.

아마 당신이 너무 외롭고, 고독하고

쓰라린 기억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지산의 시를 음미하며, 당신을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보라. 지산에게 부탁이 있다.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펜을 놓지 말기를.

나 역시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음악은 놓지 않으리...     

_ 뮤지션 승훈

이전 03화 에세이와 시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