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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음 Sep 01. 2021

나의 존재가 먼지같이 하찮아질 땐.

-슈베르트를 만난다.

누구나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어둠을 만난다.    

 


 늦은 밤, 친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이들 목소리는 생기가 넘쳤고 후배의 목소리는 많이 지쳐있었다. 한쪽에서는 울고 또 한 명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나머지 한 명은 엄마가 전화를 하고 있던 말던 보챈다. 후배는 코로나 때문에 가정 보육한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지레짐작으로 육아 때문에 많이 힘든가 보다 했다.          



“언니... 악기에서 소리가 안 날 거 같아서 무서워요.”          



 후배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마음이 애잔해졌다. 아이 둘이 뛰고 나머지 한 명은 젖 달라고 우는 이 전쟁통보다 힘든 것이 악기에서 소리가 안 나는 것이라니.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악기를 취미로 배운 것도 아니고 전공을 하며 수십 년을 연습했는데 몇 년 연습을 쉬었다고 소리가 아예 안 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하찮아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고, 의외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은 참 어렵다. 자존감은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에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줘도 스스로가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양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나도 한때 자기혐오에 빠져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시험이란 시험은 다 떨어지고 스승조차 나를 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가득한 암담한 학창 시절이었다. 겨우 입학한 대학에서는 불안증세가 심해졌는데 무대 위에서 악보를 통째로 잊거나 교수님이 말만 걸어도 하얗게 질리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시간이 갈수록 주눅이 들었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유난히 어두운 기운을 풍기는 나를 떨떠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괜찮다.”라고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었고 “할 수 있다.”라고 응원해주는 선생님이 있었으며 무대 위에서 떨면 달래주는 반주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 돌아오면 조용히 피아노 의자 아래로 들어가 볼펜으로 몸에 낙서를 해댔다. (아마 그때 내가 타투의 존재를 알았다면 지금 전신에 꽃동산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달리 특별한 방법을 몰랐다. 단지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정신없게 사는 게 목표였다.     


 독서, 공연 관람, 여행, 아르바이트, 강좌 수강, 봉사활동, 각종 덕질... 어쩌면, 그 모든 게 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닮은 슈베르트를 만났다.     



 음악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작곡가나 악기, 음악사 등 전반적인 것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음대생은 연주 기량 향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음악이론 쪽은 시험 때나 바짝 보는 게 전부이다. 나의 경우도 음악사 좋아하긴 했어도 지금처럼 작곡가의 전기를 일부러 찾아본다거나 악곡 하나하나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를 하진 않았다. 내가 작곡가들의 전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건 악기를 연주해서는 밥벌이를 할 실력이 못 된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고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고 난 후였다.   

  

 교육대학원에서의 음악 공부는 음악대학의 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였다. 음악을 가르치기 위한 공부는 악기를 잡을 필요가 없었다. 글로 배우는 음악이라니. 낯설었지만 어쩌면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 사랑은 이때가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장담컨대 음악가의 전기는 웬만한 소설보다 재밌다. 그들의 인생이 무수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슈베르트의 전기는 재미요소가 하나도 없다. 웬만한 막장 드라마보다 재밌는 연애사를 가진 다른 음악가들처럼 뜨거운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음악가에겐 당연한 듯한 연주 여행을 다닌 것도 아니었으며 유명한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전기는 한마디로 무미건조하다.     


 슈베르트는 1797년 음악의 도시라고 불리는 빈에서 태어났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박봉의 교사였지만 교육열이 대단하여 자식들에게 악기를 직접 가르쳤다. 어렸을 때부터 가정음악의 형태로 가족들과 현악 연주를 즐기던 슈베르트는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빈의 기숙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기숙학교와 그보다 상급 기관인 아카데미에서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활동에 참여하며 다양한 음악교육을 받았지만 초반에 좋은 성적을 받았던 것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성적은 떨어졌고 결국 학업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변성기로 인해 목소리는 나빠지고 그렇다고 연주자가 될 정도로 뛰어나게 잘 다루는 악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슈베르트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잠시 동안 교직에 헌신했으나 곧 그만두고 가출을 감행한다.      


 그는 평생 그의 음악을 좋아해 주는 친구들의 원조를 받으며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 기숙학교에서 같이 음악을 공부하던 친구들도 안정된 직업을 찾고 가정을 이뤘지만 슈베르트는 오직 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의 인생을 미화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귀족들의 후원을 받거나 궁정에 소속되어 연주나 작곡을 하던 동시대의 작곡가들과 달리 가장 독립적이고 주체적 음악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그는 뛰어난 재능을 흠모하던 재력가의 눈에 띄지 못했고 살아생전엔 평론가나 대중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원조를 받지 못했다면 그는 길거리에서 객사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이라네. 빛나던 희망은 사라지고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했던 행복은 고뇌로 변해버린,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마저도 꺼져가는 인간을 상상해보게나. 비참하고 불행한 인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의 전기에 중요한 증거가 되는 서신들을 보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들이 꽤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불과 한두 단락 전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음을 잊은 듯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현악을 위한 4중주 두 곡과 8중주 한 곡을 썼고, 작은 4중주를 하나 더 쓸 생각이라네. 난 교향곡을 향해 나아가고 싶네. 신이 허락한다면, 내년에는 연주회를 열고 싶다네.”     



  슈베르트의 전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음악가들의 재능에 대한 신화 대신 무수히 많은 실패담이 담겨있다. 학업도 제대로 못 마치고, 안전한 직장을 갖기 바라는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했으며 짝사랑이 대부분인 그의 연애사 등등. 그래서인지 다른 음악가들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사람 냄새가 난다.     


 나는 그의 전기를 본 후부터 슈베르트의 음악을 더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없으면서 괜히 잘난 척도 해봤다가 이내 곧 진짜 잘난 사람들을 보고는 소심해져서 우울해지고 그러다가도 작은 희망을 얻고 웃어 보이는 1년 365일 미생 같은 삶이 나와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슈베르트가 남긴 한마디에 피식 웃다가 어느새 위로를 받았다. 그가 불안정한 삶 속에서 수많은 곡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한없이 하찮아지는 자신의 존재와 세계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전화기 너머로 후배의 목소리가 밝아진 게 느껴졌다. 밝은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슈베르트의 불안정한 삶 속에서 수많은 곡을 남기수 있었던 건 스스로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여전히,  가끔.... 내가 참 하찮다. 하지만, 이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려워질 때 더욱 발버둥을 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벨 훅스의 말처럼 사랑은 행동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도 일단 행동으로 해보는 것부터 시작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 뭐라도 해보자. 31세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1000여 곡에 가까운 작품을 남긴 슈베르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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