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이음 Oct 19. 2021

가을의 낭만과 바이올린.

-드보르작, 4개의 로맨틱피스 op.75

바이올린. 아마 서양 악기 중에 피아노 다음으로 가장 대중적인 악기가 아닌가 한다. 바순, 하프, 오보에 등등은 일상생활에서 보기가 어렵지만 바이올린은 서양악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길을 가다가도 사람들 손에 들려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누군가가 바이올린이 왜 대중적인 악기가 되었느냐에 대해 물으면 나는 두 가지 이유를 들것이다. 첫 번째로 전공자들이 많다. 관현악단에서 주요 멜로디를 연주하는 중심적인 역할하기 때문에 음악대학이건 예술학교건 전공생을 많이 뽑는다. 전공생이 많은 것이 대중적인 악기가 된 것과 무슨 연관이 있냐 싶겠지만 어떤 악기던 연주하는 사람이 많아야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악기가 된다. 실제로 연주자들이 연주하지 않는 악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입문용 악기의 가격이 저렴하다. 10만 원짜리 바순은 구하기 힘들어도 10만 원짜리 바이올린은 구할 수 있다. 심지어 더 싼 악기도 살 수 있다. 취미로 배우는 건데 돈을 굳이 많이 들여서 할 필요가 있나. 하다가 그만두면 돈 아깝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겐 접근성이 아무래도 좋다. 10만 원짜리 악기도 있지만 막상 전공하게 되면 장인이 만든 억 소리 나는 악기를 들어야 한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와 바이올린의 첫 인연은 교환 레슨이라는 걸 하게 되면 서였다. 바이올린 하는 언니가 플루트를 배워보고 싶다며 먼저 제안을 했는데 집에 굴러다니던 바이올린이 있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우시던 어머니가 4년 정도 쓰시다가 연습을 해도 느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며 방치해둔 바이올린이었다. 여차 저차 하여 시작한 교환 레슨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현과 활의 마찰을 통해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마찰음이 나는데 나는 그 소리가 영 거슬렸다. 게다가 악기가 귀와 매우 밀착되어 있어 그 괴로운 소리가 뇌까지 흔들어 놓는 게 아닌가. 이 악기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들을만한 소리를 낼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고 새삼 바이올린을 전공한 친구들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가슴을 흔드는 소리 



 바이올린은 대략 500년 전에 만들어졌다. 바이올린의 구조는 겉보기에는 매우 단순하다. 실제로 기본 형태와 구조는 50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단순한 겉모습과 달리 바이올린을 찬찬히 들어다 보면 엄청나게 많은 명칭들과 마주하게 된다. 스크롤, 줄 감게, 줄 받침, 버팀 막대, f홀, 베이스 막대 등등 이렇게 복잡한 구조가 50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바이올린의 구조를 단순화해서 보면 앞판, 뒤판, 목, 옆판, 지판 이렇게 5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좋은 악기는 장인들이 굉장히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다. 바이올린 제작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주재료인 나무 선정부터가 난관이기 때문이다. 앞판은 가문비나무, 전나무 같은 침엽수 종류의 나무를 쓰고 뒤판은 단풍나무와 포플러 나무 같은 광엽수를 쓴다. 와이너리가 좋은 와인을 위해 포도 농사에 심혈을 기울이듯이 바이올린 장인들은 좋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좋은 재료를 구했으면 이제 바이올린을 제작해야 하는데 바이올린은 나무를 깎고 다듬어서 만들기 때문에 섬세한 기술이 요구된다. f자 홀을 만드는 것부터 줄감개를 깎고 바니시(바이올린을 칠할 때 바르는 것으로 악기 보호와 소리의 질을 향상하는 역할을 함)를 바르는 과정까지 사람 손이 안 가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300년 전에 만들어진 스트라디바리, 과디네리등이 아직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비싼 것이다. 재료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어떻게 닿아 있느냐가 이 악기의 가치를 증명하기 때문에 누가 만들었느냐가 중요한 가치 요소가 된다. f 홀 모양이 어떻게 빠지느냐 또는 앞판 뒤판의 곡선이 어떤 모양이냐등의 작은 차이에 소리의 질이 달라지는 악기이다. 그렇기에 바이올린의 소리는 제작자의 손끝에서 소리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상 좋은 제작자가 만든 훌륭한 악기를 얻었다고 해서 바이올린에서 좋은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바이올린은 건반만 누르면 소리가 나는 피아노처럼 줄을 활로 긋기만 하면 소리는 난다. 올바른 입술 모양을 만들 줄 알아야 소리가 나는 관악기와 달리 소리를 내는 과정은 간단하나 들어줄만한 소리를 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굳은 의지와 참을성이 요구되는 악기라 하겠다.(물론 훌륭한 연주를 하기까지 배움의 과정은 어떤 악기이던 의지와 참을성이 필요하다.)     


 내 의지와 참을성을 전공 악기 연주에 쏟기에도 버거웠던 상태였던지라 나는 2년간의 교환 레슨을 힘겹게 끝내고 바이올린과 작별하였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시작했었을 때와 달리 나는 바이올린 소리에 매료되어있었고 요즘도 이렇게 쌀쌀해지는 가을엔 바이올린 음악을 일부러 찾아듣는다. 이 악기는 내 머리뿐 아니라 가슴까지 흔들어 버린 것이다.   


       

 가슴 설레는 낭만이 그리울 때

  


 바이올린 소리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2년간의 바이올린 교습으로 인해 나의 바이올린 실력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레슨은 교환 레슨이라 불렸지만 사교의 현장이 될 때가 많았고 나는 불성실한 학생이었다. 바이올린을 배우는 게 싫었던 것은 아니다. 조이개로 음정을 조정하고 활의 각도를 맞추는 과정 하나하나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에 익숙해져 있는 나의 귀는 내 연주를 오래 참아 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한 작은 경험 덕분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들이 내는 소리가 더 좋아진 것이었다.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음악은 음반으로 접하는 것과 라이브 연주로 듣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악기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연주해보는 것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라이브 연주에서만 얻을 수 있는 현장감이 좋아하는 연주자를 바꾸고 좋아하는 음악 장르를 바꾸게 만들 듯이 악기를 직접 만지고 연주해보면 그 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연주가들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바이올린을 놓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보면 가슴이 뛸 때가 있다. 특히 선선해지는 가을엔 그 횟수가 빈번해진다.      


 클래식 음악이 대중적인 음악 장르가 아니다 보니 한국에서 연주되는 바이올린 프로그램도 한정적이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봐도 바이올린 협주곡은 차이코프스키 밖에 없나 싶을 정도로 빈번히 연주되는 단조로운 연주 프로그램이 때로는 너무 아쉽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무대에 서는 바이올린리스트 지인을 만나면 나는 어김없이 이 곡을 연주해달라고 조르게 된다.     


https://youtu.be/uBqt-ybRpw0


 드보르작, 로맨틱피스. 이 곡은 가을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바이올린 곡이다. 그런데 이 의견에 동의를 해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아마 바이올린 전공자들 조차도 “로맨틱 피스? 뭐... 멜로디가 예쁘긴 하지.”라는 정도가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이 곡은 말 그래도 소품이어서 기교를 뽐내고 싶은 바이올린 리스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며 멜로디는 아름답지만 차이코프스키나 멘델스존 콘체르토처럼 가슴을 후려치는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곡은 아니기 때문이다.      


 드보르작은 작곡가이자 비올리스트로 생존 당시 비올리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의 작품에 흐르는 전반적인 현악 선율은 구조적으로 탄탄하고 아름답다. 4개의 로맨틱 피스는 그가 친구들과 연주하기 위해서 작곡한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Minuet for two violin and viola op.75 a)를 편곡한 것인데 연주기교상으로 보면 비교적 쉽고 간단한 형태이다. 이는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아마추어 바이올린리스트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드보르작 장모님 집에서 살던 세 들어 살던 대학생이었는데 드보르작 역시 장모님 집에서 살고 있었던 터라 이곡의 탄생은 집에서 가정음악회를 하기 위해 작곡된 곡이라 보면 되겠다. 자기 복제 일수도 있지만 원 버전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맨틱피스가 인기가 있는 것을 보면 건전한 복제였다고 생각한다.


https://youtu.be/zN67TQjcKeI


 내가 가을마다 이 곡을 찾아 듣는 이유는 이 곡의 선율에서 안락함과 포근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1악장을 가장 좋아하는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박자 안에서 (물론 연주자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나는 보통 빠르기를 선호한다.) 풍요로우면서도 평온한 바이올린 선율을 피아노가 단순하고 반복적 리듬으로 바쳐준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잘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마치 봄과 여름 열심히 일해서 얻은 수확물을 쌓아 놓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가을의 정취를 즐기고 있는 심상이랄까.      


 나는 이 곡을 듣고 있다가 왠지 나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이 들어 먼지 묻은 바이올린을 몇 번 꺼내 본 적이 있다. 역시나 4마디 이상 가지 못하고 다시 바이올린을 넣어놨다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곡을 들으면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고 싶어 진다. 이제 나에게 바이올린은 가을 낭만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연주를 잘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분위기와 정취에 젖어 바이올린 케이스라도 열어봐야겠는 그런 두근거림을 선사하는 존재 말이다.      


 성인이 되어서 악기를 배우러 오는 분들 중 잔뜩 주눅이 들어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계이름도 못 봐요. 손이 작아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악기 연주를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나는 어김없이 나의 바이올린 이야기를 꺼낸다. 어른이 돼서 시작한 악기는 낭만으로 하는 거예요. 하고 말이다. 모든 걸 다 잘할 수도 없고 잘할 필요도 없다. 때로는 깊은 생각 안 하고 두근거리는 낭만을 찾아 자신을 온전히 맡겨 보는 것도 좋다. 가을엔 낭만이니까 말이다.


이전 02화 팔색조의 매력, 플루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