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일 8시간에서 탈출

오랜 도돌이표 끝에 퇴사하다

by 평정

아침부터 싱글벙글,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참 기분이 좋구나.’ 이토록 상쾌하고 즐겁다니, 무려 회사 갈 준비를 하는데 말이다. 최근 몇 해 동안 이런 날이 있었는지 곱씹어 보아도 오늘이 최고로 기분 좋은 날인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마지막 출근일이니. 첫 출근일에 떨림과 설렘이 있다면 마지막 출근일에는 시원함과 때에 따라 동반되기도 아니기도 한 섭섭함이 있다. 회사를 떠날 때 동료들이 배웅해 주는 인사 자리는 상상만으로도 좀 민망하지만 앞으로의 행복을 위한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면 그 잠깐의 어색함 정도는 기꺼이 넘길 수 있다. 정말 실현될까 싶지만은 그 순간만큼 진심이리라 믿는 응원의 말들을 나누고 마지막으로 진정성 있는 웃음을 남기며 그렇게 안녕했다. 퇴사 경력직답게.


꾹꾹 눌러 담았던 ‘퇴사’란 말은 몇 달 전 대표님 앞에서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무수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각오했다, 포기하고, 마음을 다잡았던 기간이 무색할 만큼 무미건조하게 툭 튀어나왔다. 매일 아침 으레 건네는 “안녕하세요” 인사와 같이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지금 이 시기에, 이런 순간에, 이런 식으로 얘기할 생각은 없었던지라 상당히 충동적으로 벌어진 상황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큰일 났다 싶은 후회나 드디어 저질러 버렸다 같은 후련함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잘하지도, 잘못하지도 않은 그 선택은 사회생활을 하는 매 순간 기로에 놓인 여러 옵션들 중 하나일 뿐이고, 그저 그때 그런 결정을 해버린 것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 자신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할 뿐.


돌이켜보면 그날따라 날씨가 유독 좋았다. 한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우중충했던 회색빛 구름도 사라져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구름은 티끌 한점 없이 하얗고 깨끗했다. 햇빛은 적당히 쨍쨍했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 출근길임에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마저 미세먼지 없이 쾌적했다. 날씨를 타는 마음이 덩달아 두둥실 들뜨는 걸 느끼며 기분 좋게 출근했더랬다. 건물 출입문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 좀 사그라들긴 했지만 이 정도면 퇴근 때까지 웬만한 일도 수용하며 하루를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난관도 긍정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던 그 마음은 물론 퇴근 때까지 지속되지 않았고 모종의 사건들로 인해 금세 휘발됐으며 종국에는 인연의 끝을 고하는 것으로 끝맺음되었다.


한 번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대표님 앞에서 퇴사를 거론했는데 다시 주워 담는 건 아닌 것 같아 다소 지리멸렬한 과정 속에서도 나만은 굳건하고 쿨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쉬고 싶다는 것이었으나, 몇몇 상황을 제외하고는 과연 그 누가 한 가지 이유만으로 퇴사를 결심할까? 마치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는 것처럼 모두들 각자만의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사내에서 짧지 않은 근속연수를 지닌 고연차 직원으로 회사의 면면을 알고 있었던 만큼 애愛와 증憎의 마음이 상당했다. 그만큼 놓기 어려웠는데 또 그래서 쉽게 떨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루이틀한 고민이 아니었던 지라 시간문제였을 뿐 언젠가 일어날 일이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느낌이었다. 단지 아쉬운 건 새해, 새로운 마음가짐을 결의하며 퇴사를 막기 위해 큰돈을 쓰듯 얼마 없는 목돈을 예금이며, 잘 알지도 못하는 ISA 통장 등에 묶어 놓았다는 것뿐. 여차하면 해지하고 출금하면 되긴 하지만 그 결의가 몇 달 가지 못했다는 게 다만 아쉬웠다.


퇴사를 확정한 뒤에도 상당 기간 동안 인수인계라는 명목 하에 출퇴근을 반복하며 하던 일과 했던 일, 앞으로 하게 될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했다. ‘이걸 내가?’ 싶은 일도 허허 웃어넘기고, ‘왜 나한테?’ 싶은 일도 눈 찔끔 감고 버텨냈다. 다소 지지부진한 시간들을 지나 마침내 끝이 났다. 계획도, 준비도 없이 말 그대로 대책 없이 그만두었다. 현실의 상황이 걱정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좀 더 간절하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오래 회사를 다니기도 했고, 그동안 예상치 못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내 안의 많은 것들이 소진된 것 같았다. 텅 비워져 나풀나풀거리는 내면의 코어를 다잡기 위해 당분간(?) 모든 것을 미뤄 두기로 했다. 퇴사의 이유가 마냥 명목상의 이유는 아니었던 거다.


작금의 상황과 현실적인 조언은 무작정 쉬는 게 정답이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쉴 수 있을까? 100세를 넘어 120세를 바라보는 이 시대에 앞으로 남은 날들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뛰기 전에 재정비하고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의 쉼이 훗날 되돌아볼 때 찰나의 여유가 되길 바라며, 나중에 후회할지라도 그것은 내일의 나일 테니 오늘의 나는 일단 좀 누려야겠다. 주 0일 0시간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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