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다고? 결혼하니?

불혹을 앞둔 미혼 여성의 퇴사에 대한 현실 반응

by 평정

“저 퇴사하려고요.”

“결혼하니?”


결의에 찬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건넨 퇴사 의사에 무지개 반사되어 온 반응이 결혼이라니, 뜬금없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 자리를 파한 뒤에도 여운이 꽤 남았다. ‘퇴사랑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지? 퇴사하면 결혼하나? 결혼하려고 퇴사하나? 결혼하는 데 왜 퇴사하지? 결혼하면 더 퇴사 안 하지 않나? 결혼이란 믿을 구석이 생겨 퇴사한다는 의미인 건가?’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그 말에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곱씹어 볼수록 혼란스러웠다. 더 어릴 적 퇴사한다 했을 때 이런 반응은 없었는데 이젠 적지 않은 나이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여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둘 다여서 그런 건지...! 근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다 보니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렀다. 상대방은 별생각 없었을 수도 있지만 왠지 나를 바라보는 현실의 단면을 마주한 것 같았다.


집도 절도 없는 #30대 후반 #미혼 #여성 #직장인 백수

“언제 다시 취업하게?” 나의 근황을 전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얘기이다. 내 대답은 “조금 전에 퇴사했는데...” 재충전을 위해 당분간 쉬고 싶은 거지 영원히 일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이직을 하긴 해야 하는데 요즘 같은 경기 침체 속에서 취업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닌지라 그 시기를 정한들 그대로 될까 싶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열린 결말처럼 얘기하는데 역효과인지 빨리 재취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언이 붙는다. 이유는? 슬프게도 나이 때문. “더 늦기 전에”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반평생도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늦음을 논해야 하는 걸까. 주변 미터에서 접한 케이스들로 보아 취직도 운과 타이밍이 따르는 일인데, 부디 그 좋은 기운이 내게도 닿기를 바란다.


“어떻게 퇴사했어?” 어떻게는 뭐 어떻게야, 퇴사한다 말하고 나왔지. 물론 나는 작은 회사를 뛰쳐나온 거지만 고액 연봉의 대기업도, 정년 보장의 공기업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크고 작은 회사들도 퇴사 절차는 대동소이할 텐데 무엇을 묻는 건지...? 단순히 ‘어떻게’를 묻는 게 아닌 것쯤은 알지만, 그 속에 함축된 의미들까지 일일이 꺼내어 보고 싶지 않아 조용히 덮어둔다. 그 대신 “그냥~” 이라거나, “미래 생각 안 하면 할 수 있어.” 라든가 하는 우스갯소리로 때운다. 어김없이 부럽다는 반응이 뒤따르는데 그땐 힘차게 응원해 준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돈은 좀 있고?” 사회생활한 지 10년이 넘어가니 아예 없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금전적인 걱정이 없진 않다. 물론 당장 굶어 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마이너스인 삶을 살기엔 모아놓은 돈이 넉넉하지 않은 것도 사실. 금수저도 아니고, 재테크의 달인도 아니고, 재물운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돈만 생각하면 속이 쓰리긴 하다. 직장을 계속 다녔다면 월마다 통장에 몇 백만 원이 꽂히는 데 싶고, 그러다 보면 그냥 다닐 걸 그랬나? 이직 준비를 해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들이 언뜻 스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어서 그런지 다행히(?) 퇴사 자체를 후회하진 않는다. 그저 예상 가능한 경제적 문제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 풍월에 따라 퇴사 전 생애 최초 마이너스 통장도 보험 삼아 개설해 놓았는데 쓰는 날이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력서는 썼어?” 예.. 니오...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 등은 퇴사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게 정론이다. 하지만 나는 하기 싫어서라기보다... 는 바로 취업을 염두에 두지 않아 나중으로 미뤄 두었다. 좀 기간을 두고 되돌아보면 정리가 더 잘 될 것 같았고 일정 부분 맞긴 했다. 뒤늦게 이력서의 칸들을 채우고 보니 새삼 스스로가 작아 보이고 자신감이 저하된다.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일하며 버텨 온 나의 발자취가 단 몇 줄로 정리되다니, 이력서의 힘이란! 자소서와 포폴이 잘 갈무리됐는지도 아리송하다. 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써야 한단 말인가... 이걸 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이 앞선다. 겸손이 미덕인 나라에서 자라서일까 이 연차에도 나를 포장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옆에서 보니 유능하다는 평가에는 이력서 조건표에 담기지 않는 많은 요소들도 포함되는데, 손발을 맞춰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안타깝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일과 스타일, 분위기, 회사가 따로 있는데 이 또한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안타깝다. 뭐든 되는 AI 시대, 척하면 척하고 회사와 인재를 알아서 매칭해 취직시켜 주면 차암 좋겠다.


“서류 광탈에 면접에도 잘 안 불러요.” 동병상련이 전하는 정보는 심란하다. 요즘 같이 말도 못 할 불 of 불경기에도 수많은 구인공고가 올라 오지만 정작 내 자린 없는 것 같다. 마음은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성장할 수 있는 회사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역량을 쌓아가고 싶다. 멈추기보단 점프하고 싶은데 현실은 더 이상 오를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팀장 이상의 높은 직급일수록 이동할 수 있는 자리는 더 적고, 나이와 연차와 연봉을 모두 충족시키는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다고 다들 입모아 말한다. 바늘구멍을 통과해도 대부분의 회사가 가성비를 따지는 지라 비슷한 조건에서는 더 적은 연봉이 메리트다. 연봉 테이블은 회사마다 다르고 상대적이라 내 연봉이 누군가에겐 높고 누군가에겐 낮고 또 어디서는 평균일 것이다. 다만 고만고만했던 저연차 때와는 달리 한 해 한 해 피와 땀으로 노력해서 올린 소중한 지금의 연봉을 되도록이면 지키고 싶어 눈물이 난다.


사실 난 ‘나이의 굴레’에 대해 잘 몰랐고 크게 체감하지 못했다. 대문자 P의 성향 탓인지 인생의 어느 순간, 무엇을 꼭 하겠다 정해두지 않고 흘러 흘러 왔다. 그래서 몇 살 때 이래야 하고 몇 살 때 저래야 하고, 몇 살부터는 안 되고 몇 살까지 가능하고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깜짝 놀라곤 했다. 점점 나이는 먹어 가는데 순간순간 한계를 그어 놓으면 이 긴 인생, 어떻게 사나 싶어 앞이 깜깜하다. ‘그때 그래야 했나?’ ‘이때 이래야 했나?’ 하는 뒤늦은 성찰의 시간만 늘어 간다. 괜스레 직장 선배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회사를 다녔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내일모레 마흔이라는 나이와 현실을 떠올리면 이런저런 생각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데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 어쩔 수 있나. 복잡다단한 마음 붙잡고 행운을 빌며 오늘 하루를 잘 보내 보는 수밖에.


“취업운 대박 나게 해 주세요! 아니면 로또 1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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