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쓰다/28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1:2)
영혼에 대한 마음을 주신 건 하나님 뜻이었을까? 교회 안에서건 교회 밖에서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심리를 공부하면서 아마도 생긴 호기심이려나?
나름 성공을 위해 애쓴 시간 동안 사람을 만나며 성공을 위해 성공만 보고 달릴 성정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 뒤로는 오히려 자유함이 느껴졌다. 성공을 위해 내달릴 땐 잡히지 않는 성공 때문에 좌절하기 일쑤였지만 사람을 알게 되고 사람을 바라보게 됨은 성공의 차원이 아니었다.
거창하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본다고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영혼에 대한 애절함과 안타까움은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가깝도록 나를 이끌었다.
사랑은 이해라고 할까? 이해하기 위해선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이해되기 때문이 아닌 이해되지 않아도 사랑해야 마땅할 터지만 불이해를 가지고 사랑을 얻을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수용하겠다는 마음인 것이다.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살면서 되는 것이라 믿는다. 그 살면서 된 연유에 대한 궁금증과 이해가 사람에 대한 수용력을 높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알고자 하면 알 수 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머물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혼에 대한 마음은 그 영혼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자 그것이 영혼을 위한 최고 이해의 값이다.
어제오늘 사람으로 인한 피곤함이 한가득이지만 결국에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을 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