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쓰다/2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장:9~11절)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이 사랑이라 하시는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며 살았을까? 사랑에 반대되는 미움을 많이 품지는 않았으니 선방은 한 것일까? 살다 보니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었지만 말이다. 미움도 사랑의 한 형태라는 것, 비록 그 사랑이 변질되어 미움으로 둔갑한 것이지만.
온전한 사랑보다는 사랑의 왜곡인 미움은 그동안 참 많이 쌓아온 거 같다. 결혼 생활 내내 미움이 내 안에 자리 잡았고 그 미움은 원망이 되고 좌절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의 온전한 사랑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보이는 교회 안에서는 마치 행복한 부부인양 쇼윈도 행세를 하기도 했다. 여전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적어도 미움보다는 사랑에 가까운 쪽이니 쇼윈도까지는 아니려나?
특히나 그랬던 거 같다. 교회 안에서는 우리 가정이 굉장히 안정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였던 것. 대부분 두 자녀인데 반해 세 자녀에 남편이 꼬박꼬박 교회까지 오니 얼마나 보기가 좋았겠는가? 거기에 인사성 밝은 남편 덕에 인사성 없고 필요에 의한 사회성만 장착한 나로서는 나와 비교되게 보기 좋은 꼴을 하고 있는 남편이 곁에 있으니 저절로 결혼 잘한 자매가 되어 버린다. 아니 되어 버렸다.
사랑이 제일이라 하신 말씀 앞에 단 한 번도 부끄럽거나 찔리는 것 없이 믿음 생활을 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구체적으로 고민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사랑이 충만한 요한 일서 전체를 읽으면서 나의 사랑 없음이 자꾸만 불편하게 다가온다.
나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걸까? 그 어려운 사랑의 실천에 순종하라 하시는 말씀일까? 사실 남편에게는 사랑이라는 거 조차 어찌 행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사랑해서 결혼을 했을 텐데 결혼 생활을 거듭할수록 사랑은커녕 사랑의 결과물(?)만 가지고 겨우 결혼 생활을 연명하는 거 같은 우리 부부.
서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의 공백도 물론 한몫하겠지만 애초에 서로에 대한 받아들임이 가장 부족한 부부다. 사랑이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거라면 이미 넘치도록 하고 있다. 참고 견디는 것만 해서 문제이지만 말이다.
참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일 텐데 내 모든 수고로움 앞에서 그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기는 세상 쉽지 않다. 온갖 세상짐 지고 가는 어린양 같은 내 마음에 어찌 하나님의 눈이 가당 키나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인내할 수 있었던 건 위로이자 기쁨 그리고 축복이었던 세아이덕이다 세상 제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나에게 세 아이는 살아갈 이유이자 힘이요 원동력이었다.
요즘 유튜브 영상대신 찬양을 틀어놓으니 어느새 아이들이 흥얼거리며 따라 한다. 아이들 찬양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은지 말이다. 그간 내 삶의 피로감으로 그저 가벼운 위안 차원에서 틀어놓았던 여러 영상 대신 찬양은 나뿐 아닌 아이들에게도 찬양의 향기를 스미게 한다.
여전히 사랑 없음에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나아간다. 사랑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을 수 있도록 말이다. 사랑이 가득한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