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ggles Feb 17. 2024

너도 정신과 약 먹어? 나돈데.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약을 먹기로 결정했을 무렵에도 여전히 마음속에선 정신과 약을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쉽게 가시질 않았더랬다. 그러다 문뜩 몇 년 전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했던 친구 이야기가 기억이 나서 곧장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기… 너 예전에 우울증 약 먹었던 적 있다고 그랬잖아. 어땠어?”


자주 연락 하고 지내는 친한 친구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일을 물어보는 건 처음이라 혹시 실례가 되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될 찰나, 친구는 뜸 들임 없이 바로 답장을 줬다.


“어, 나 그때 렉사프로 먹었어. 너 많이 힘들구나? 나도 사실 힘들어서 몇 주 전부터 다시 먹기 시작했어.  궁금한 거 있음 다 물어봐. 내가 무엇이든 다 대답해 줄게”.


비록 문자였지만 친구가 나의 고통을 얼마나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몇 자 안 되는  짧은 텍스트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친구 역시 가족력이 있었고, 아빠도 언니도 오랫동안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친구는 첫 아이 출산 후 산후 우울증을 겪었을 때, 또 둘째를 임신한 지금도 약을 먹으니 큰 도움이 됐다며 약복용을 망설이는 나의 마음에 확신을 불어넣어 줬다. 자기도 남편이나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봤기에 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한국에 있는 엄마, 아빠, 동생도 우울증과 불면증, 불안장애 약을 복용한 적이 있고 삶의 이유로 증세가 재발할 때면 여전히 다시 약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들의 경험담 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인 친구의 경험담이 나에게는 왠지 모를 더욱더 큰 위안을 신뢰를 주었다.


미국에선 아무래도 한국보다는  정신과 약 복용에 대한 편견이 훨씬 덜하기에 약에 대한 대화도 더 자유롭고 숨김이 없다. 나의 상태를 숨기지 않고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은 생각보다 의외였다. 함께 일하던 동료, 대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언니, 나와 친한 친구들 등 많은 사람들이 지금 약을 복용 중이거나 복용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의 종류도 다양했다.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SSRI) 계열 복용은 아주 흔했고 내가 가장 꺼려졌던 항불안제를 복용하고 있는 친구들도 꽤 되었다.


“나는 옛날부터 자넥스 가지고 다녀” (26세 여, 직장친구, 백인)
“내 여동생은 얼마 전에 단약 했는데 프로작 먹었어” (28세 여, 직장동료 백인)
“아이고 너도 약 먹기 시작하는구나? 나는 졸로푸트 먹어” (38세 여, 대학동창, 동양인)
“내 친구도 얼마 전에 먹기 시작했는데. 뭔지 물어봐줄까?” (34세 여, 절친, 동양인)
“나는 불안할 때 비상용으로 엠비엔이나 아티반 가지고 있어”(35세 백인 혼혈)
“내 남편은 비행기 타기 전에 클로노핀 먹고 타자나” (36세 여, 절친, 한국인)


나와 아주 가까운 지인들 중에 정신과 약을 먹는 사람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사실 너무 많아서 건너 건너 한 명쯤은 어떤 종류든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동안 나는 절대 눈치 체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와 가까운 친한 친구들과 그의 가족, 친구들도 각자의 괴로움을 상대하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고 보면 이들 또한 겉으로 봤을 때 고학력, 고연봉, 행복한 가정, 슈퍼우먼, 가장, 워킹맘 등 안정된 삶을 멋있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문뜩 나만 왜 이렇게 아프고 어려운 걸까 하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주 조금은 편해졌다. 이제 큰 두려움 없이 약을 먹을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너 정신과 약 먹어? 나돈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