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발작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광장공포증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또 다른 지옥이었다. 코로나 후유증이 확정된 이후부터 이미 상담치료를 몇 달간 매주 진행해 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상담 선생님 마저 먼저 약을 권 할 정도로 나의 상태는 많이 좋지 않았다.
벌써 몇 주째 매일 아침이면 검은 공기가 내 몸을 감싸는 쎄 하는 느낌이 퍼지며 팔다리가 마치 내 것이 아닌 듯 불편하고 찌릿찌릿해왔다. 그렇게 세네 시간 정도 소파에 누워 보이지 않는 무엇과 한참 씨름하고 나면 오후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 이상했던 느낌과 기분이 썰물처럼 쏴악 빠져나간다. 그러다가 다시 잘 때쯤이 되면 하염없이 땅으로 꺼져가는 느낌과 마치 내가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 채 숨이 가빠지고 심장은 쿵쾅대고 손발은 다시 저려오기 시작한다. 겨우 잠들어도 아침이 되면 다시 반복될 이 증상들에 오늘밤 잠이 들면 내일 절대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대로 차라리 잠든 채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잠든 날들의 연속이었다.
물론 병원을 가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광장공포증을 처음 겪은 그날 바로 주치의에게 연락해서 사정하다시피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주치의는 나의 상태와 증상에 잘 공감해 주었고 코로나 후유증으로 인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일임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처방받은 약은 바로 하이드록신(HydrOXYzine) 10 mg. 항히스타민제이다. 웬 항히스타민제? 보통은 알레르기에 처방하는 약이지만 그 부작용인 졸음과 나른해짐을 이용해 불안증세를 낮추기 위해 자주 처방하는 약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약을 먹으니 이미 최고조에 달한 무기력증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해 오히려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최대한 빠른 날짜로 정신과 의사 진료를 요청했지만 워낙 대기환자가 많아 4개월 뒤에나 예약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은데 정신과 의사를 보는데 4개월을 기다리라니. 한국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다.
간절한 마음에 다른 정신과 의사를 찾아봤지만 다른 곳도 다 마찬가지였다. 답답한 마음은 물론이고 이렇게 큰 미국의 대도시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 저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무슨 약이라도 제발 주세요."
결국 주치의 선생님을 다시 찾아갔고 선생님은 급한 데로 가바펜틴 (Gabapentin) 100mg과 렉사프로 (Escitalopram) 5mg을 처방해 줬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항불안제는 아직 처방해 주기 이르다고 말했다. 가바펜틴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약이었다. 내가 병원에서 일할 때 허리나 다리 등 정형외과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자주 처방되는 신경진통제이다. 신경진통제를? 역시 공황발작이 있을 때 간접적인 안정효과를 주기 위함이었다. 렉사프로는 처음 들어봤지만 찾아보니 SSRI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계열로 우울증과 불안장애 등에 흔하게 처방되는 약이었다. 워낙 약에 민감한 나의 체질을 잘 아시는 의사 선생님은 가장 작은 양인 5mg을 처방해 주셨다. 진짜 코딱지만 한 크기였다.
한국에서는 신경정신과 첫 진료를 갔을 때 이름 모를 약들을 한 움큼씩 받고 비상시나 필요시에 먹을 수 있는 항불안 신경안정제도 잔뜩 받았었는데 이곳에선 겨우겨우 애원해서 받은 것이 알레르기 약과 진통제와 렉사프로 5mg 이라니. 약을 잔뜩 받았을 때는 먹기가 꺼려지고 망설여졌는데 (그래서 먹지 않았었다.) 오히려 감질나게 처방해 주니 더욱더 약만 있으면 해결될 것 같은데 왜 제대로 된 안정제를 주지 않는 것인지 하는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무엇이 더 맞는 치료법인지 알 수 없었지만 참 아이러니 했다. 뭐가 됐든 나를 이 지옥 같은 병세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약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