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30주년, 우리 부부 떠날 수 있을까?
올해가 우리 부부 결혼 25주년이다. 나 27살, 오빠(나는 남편을 아직도 이렇게 부른다) 28살에 결혼해서 시부모님 모시고 6년을 살면서 큰아들을 낳았다. 시어머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예정대로 분가해서 둘째아들을 낳았다. 남편과 좀 멀어진 틈에 시아버님도 돌아가셨다. 결국 우리 네 식구는 시부모님과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껏 살고 있다. 25년이란 세월을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을 겪었구나 싶으면서도 언제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지 '시간이란 것이 참 별거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빠와 나는 이제 나이 50을 넘겼으니 앞으로 살 날이 30년 또는 40년쯤 될까? 살아온 세월보다 짧게 남은 인생, 오빠와 함께 잘 살고 싶다.
11월 8일이 결혼 25주년이었다. 서양 풍속에서는 결혼 25주년을 은혼식이라 기념하며 부부가 서로 은으로 된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재수생 아들의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 긴 여행이나 거창한 파티는 하지 못하고 하루 휴가를 낸 남편과 가까운 무의도에 다녀왔다. 함께 걷고 이야기 나누고 사진 찍고 맛있는 안주에 술 한 잔 하고 집이 아닌 숙소에서 하룻밤 자고, 뭐 그리 대단할 것 없는 결혼 기념일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설레고 행복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남편이 멋져 보이고 남편의 실없는 농담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벅한 하루였다. 나이가 들수록 남편과 둘이 있는 시간이 가장 편하고 좋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부부는 입버릇처럼 "떠나자!"를 외친다. 동네 청량산 산책을 하면서 바람이 너무 좋을 때, 사람 많지 않은 한적한 곳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을 때, 우리 취향의 소박한 상차림에 낮술 한잔 기울일 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금만 참자, 곧 떠나자" 한다. 환절기만 되면 재채기에 충혈된 눈으로 고생하는 남편이 도심에서만 벗어나면 눈이 맑아지고 숨소리가 조용해진다. 그럴 땐 하루빨리 떠나야 할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꽤 오래 전에 도시를 벗어난 곳에서 제 2의 인생을 살아보자고 약속했다. 서류로 도장 찍고 공증받은 계약이 아니니 우리 부부의 구두 약속은 상황에 따라 연기되거나 수정되거나 최악의 경우 취소될 지도 모르지만 일상에 지쳐 있을 때 "떠나자!"라는 구호를 마음 속으로 외치면 힘이 솟곤 한다.
우리는 부모를 모두 여의었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엔 두 아들과 관련된 일들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다. 23살 군인 큰아들과 20살 재수생 작은아들이 우리에게서 독립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5년, 큰아들은 제대해서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테고, 작은아들은 군대 다녀와서 대학 생활 막바지이지 않을까 싶다. 남편은 얼마 전 회사 지사를 옮겼는데 일이 많고 힘든 곳이라 고생하고 있다. 5년 주기로 발령이 나는 회사라 퇴사가 아니라면 앞으로 5년은 나 죽었네 하고 견디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는 딱 5년만 참기로 했다. 아들들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아들들 뒷바라지 하면서 우리의 노후 자금을 준비하려면 지금 당장은 어렵다. 돈 모을 시간이 필요하다. 논술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나도 5년이면 더 이상은 아이들 가르치기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체력도, 감각도, 에너지도 점점 약해질 테니 말이다. 5년 후면 우리 결혼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우리 부부의 30주년 금혼식은 5년 후 제주도에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내년부터 우리나라 이곳 저곳을 다니며 살만한 곳을 물색해보고 괜찮아 보이는 지역에서 6개월이나 1년씩 살아보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야!' 싶은 곳에 정착하기로 말이다. 그런데 남편도 알고 있듯이 내 맘의 1순위는 제주도이다. 왜 제주도인가? 사실 제주도를 자주 가본 건 아니다. 2018년 1월 겨울에 고1, 중1 두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했고, 작년 여름 큰아들이 군대 가기 전 아들과 단둘이 3박 4일 제주도 여행을, 그리고 올해 2월엔 입시를 끝낸 작은아들과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이유는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주도에는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바다와 산(오름 포함)은 물론 올레길이 곳곳에 뻗어 있고, 도서관과 서점 그리고 재래 시장까지 매일이 지루할 것 같지 않다. 남편과 함께라면 우리만의 속도로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나답게, 우리 부부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맞벌이로 살아 왔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 어깨가 무거웠을 남편을 5년 후부터는 내가 좀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남편의 느긋하고 소박한 성정을 내가 지켜주고 싶다. 남편에게는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나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다. 열심히 글을 써서 책을 한두 권 정도 더 출간한 후 강사 출신 저자라는 이력으로 강연자가 되는 것이다. 제주도에 살면서 강연 있을 때마다 남편과 함께 여행하듯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면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말년 꿈이다. 남편은 내 로드매니저로 일하고, 나는 읽고 쓰면서 강연으로 우리 두 사람 생활비만 벌면서 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할 만한 여행지와 맛집을 찾는 걸 잘하고, 운전하는 걸 즐기는 남편에게 딱 어울리는 노후가 아닐까 싶다. 아직은 막연한 꿈일 뿐이고 갈 길은 멀지만, 5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간절히 원하고 목표를 향해 가다보면 우리가 바라는 삶 비슷하게는 살 수 있지 않을까? 50대 중년의 우리 부부에게도 설레는 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