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에 나는 15살 내 차와 이별했다. 노후차량 조기폐차를 결정한 것이다. 학원을 운영할 때 출퇴근 또는 학원 아이들 등하원 용도로 쓰던 SUV 차였다. 처음엔 우리 집 공용차였지만 어느 순간 내 명의가 되었고 남편도 어쩔 수 없이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학원을 그만두고 내 차는 주차장에 세워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차 상태가 아직 멀쩡했고 당시 암 투병 중이던 친정 아빠의 주보호자가 나였기 때문에 자동차를 처분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빠가 돌아가셨다. 내 차의 쓸모가 줄었다. 돈을 벌지 않는 상태였으니 나가는 돈을 어떻게든 줄이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저감장치를 장착해 좀 더 내 곁에 둘 수도 있었지만 과감히 결단을 내렸다. 그후로 남편 차가 갑자기 길가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멈춰버리는 일이 생겼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신중하게 가벼운 국산 중고차를 샀다. 그 차가 지금 우리 집 공용차이다.
내 차는 없지만 나는 지금까지 자가용이 없어서 겪는 불편함은 크게 느끼지 못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뚜벅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너무 덥거나 추운 때가 아니면 일주일에 3일 출근하는 학원에 4,50분 걸어서 간다. 퇴근할 때는 나보다 먼저 퇴근한 남편이 차를 가지고 학원 앞으로 데릴러 오니 불편하기는커녕 남편과 잠시라도 차안에서 정담을 주고받을 수 있어 좋다. 남편은 얼마 전 회사 지점 발령이 나고서는 주차 공간이 마땅치 않다며 집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남편이 차를 가지고 다닐 때에도 내가 차를 써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남편은 아무 불만없이 차를 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우리 부부에게 자동차는 생활에 요긴한 품목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큰 의미는 없다.
요즘은 남편과 아내가 각각 한 대씩, 한 가정에 자동차가 두 대인 경우가 많다. 남편은 출근용, 아내는 아이들 등하교, 등하원 시키고 개인 운동이나 쇼핑, 약속을 위한 용도이다. 내가 다니는 학원이 있는 신도시에서는 다양한 외제차를 흔하게 볼 수 있고, 전업 주부들도 체구에 비해 엄청 큰 중형차를 모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부부와 가끔 만나는, 남편의 오랜 친구 커플은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주 비싸고 큰 차를 각각 몰고 다닌다. 우리처럼 50대 정도 되면 중후한 느낌의 고급 세단 자동차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그렇겠지만 도시에 너무 많은 차를 볼 때면 그 쓸모를 좀 따져봐야지 않나 싶다. 우리 부부는 우리 네 형제 중에 가장 작은 차를 타는 것에 별 거리낌이 없다. 우리 집 형편에 우리 집 용도에 우리 차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차는 살 때 가격도 부담이지만 유지비도 거기에 비례해 차이가 나니 말이다.
15년 동안 자동차와 꼭 붙어 생활하다가 내 차 없이 4년 넘게 살고 있는데 나는 전혀 불만이 없다. 자동차세, 보험금, 주유비 등에 신경쓸 필요가 없으니 편하고, 그 돈을 고스란히 저축할 수 있으니 여유롭다. 가끔 서울 갈 일이 생기면 책 한 권 챙겨서 여행하듯 전철을 타고 다녀온다. 멀미도 좀 걱정이 되지만 책 읽기에 버스보다는 흔들림이 덜한 전철이 훨씬 낫다. 왕복 4시간 가까이 걸리는 외출도 마다하지 않고 약속에 늦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지루해하지 않는다. 책 한 권이면 시간 의식하지 않고 충분히 몰입할 수 있다. 게다가 전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자동차 운전으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선물이다. 무엇보다 서울은 주차 공간이 협소할 뿐만 아니라 주차비도 비싸고, 길마다 차는 막히고, 도대체 도착 시간을 예상할 수 없으니 내 차가 있어도 운전해서 갈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웬만하면 걷는다. 내가 워낙 걷는 걸 좋아하고 또 남편보다 잘 걷는 편이라 어느새 남편도 내 곁에서 걷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술자리가 있으면 우리는 당연히 차를 놓고 대중 교통을 이용한다. 약속 시간이 좀 여유로우면 천천히 걸어서 가기도 한다. 등산도 좋아하는데 등산 후 파전에 막걸리 한 잔 즐기려고 일부러 차를 놓고 가기도 한다. 물론 차가 없으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돌아오는 길이 힘겹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은 걷는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디를 가든 한 사람이 운전을 하면 조수석에 있는 사람은 운전하는 데 방해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게 된다. 왕복 시간이 많이 걸리면 운전한 사람은 걷는 것 못지않게 힘들어하며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쓰러지기 일쑤다.
함께 걸으면 피로도 공평하다. 손이 자유로우니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있고, 서로의 속도에 맞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기도 좋다. 자동차를 타고 휙휙 지나갈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보고 감탄하고, 작은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함께 걷자고 다짐한다. 돈 많이 벌어서 비싸고 큰 차를 사는 건 우리 부부의 계획에는 없다. 건강하게 자연을 걸을 수 있는 노후를 바랄 뿐이다. 올해는 우리 둘째 입시가 마무리될 테니 우리는 좀더 여유롭게 여기저기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뚜벅이로 사는 지금이 난 참 좋다. 언제까지나 뚜벅뚜벅 걸으며, 내 삶을 또박또박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