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를 끝낸 재수생 아들에게...
어학 사전에 안되다를 검색해보면 '일, 현상, 물건 따위가 좋게 이루어지지 않다'라는 동사의 뜻이 나오고 그 밑으로 '섭섭하거나 가엾어 마음이 언짢다'라는 형용사의 뜻도 보인다. 재수생 우리 둘째아들 입시 결과가 안됐다. 입시 결과가 모두 안됐고, 아들과 우리 부부도 좀 안됐다. 대학 결과가 모두 발표되고 힘이 쭉 빠졌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실망이라고 하기엔 이럴 수도 있다고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한 덕분에 비교적 괜찮다. 정말 괜찮냐고 물으면 속이 좀 울렁거리고 귀뒤에서 겨드랑이 밑까지 찌르르 뭔가 흐르는 기분이 드는 걸로 봐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은 못하겠다.
결과를 이야기하며 씁쓸하게 웃는 아들에게 어제와 똑같이 묻는다. "밥은? 배 안 고파?" 라면물을 끓이는 아들에게 '밥 먹지' 라고 혼잣말처럼 건네다 김치를 상에 놔주고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다시 일어나 주방에 있는 아들 곁을 서성인다. "2년이나 고생했는데 결과가 이래서 어째? 속상하지?" MBTI E인 엄마와는 달리 누가봐도 I인 아들 "할 수 없지. 군대 신청해야겠어. 5월 안에 가려면 지금 해야 한대."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한다. 저 속이 어떨가 싶어 또 한 번 가슴이 찌르르, 2월 1일에 큰아들이 전역했는데 이제 작은아들까지 보내야 하는구나. 내 속도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다.
속상한 마음은 삼키고 섭섭함은 감추고 우리 네 식구는 평소와 똑같이 저녁을 함께 먹었다. 큰아들이 포장해온 치킨과 남편이 사온 맥주를 준비해 작은아들과 함께 자정에 우리나라와 요르단의 축구 경기를 봤다. 스포츠를 너무 좋아해서 스포츠 관련 학과를 지원했던 둘째와 제대로 축구 경기를 봐야지 싶어 1시간 잠을 자면서까지 컨디션 조절을 했는데 우리나라 축구까지 답답하다. 맘 놓고 한숨쉬고 타박하고 결국엔 자리를 박차고 내가 가장 편한 자리, 책상 앞에 앉아 어제의 일기를 마무리했다. 결국 우리나라는 요르단에 2대 0으로 지고 결승 진출이 안됐다. 우리나라의 주장 손흥민은 본인은 열심히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거듭 '죄송하다'고 말했다. 손흥민도 안됐다. 2년 동안 대학 입시 치르느라 몸고생, 마음고생한 우리 아들이 더 안됐다. 방으로 들어간 아들에게 굿나잇 인사를 건넸다. "잘 자라, 아들"
2023년 2월 7일
입시를 끝낸 아들에게
우리 아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수시로 모든 것이 결정된 친구들도 있는데 우리 아들은 정시라서 설 연휴까지 쉬지 않고 실기 시험을 준비했으니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지금 생각해도 안쓰럽고 대견해. 코로나가 시작되고 고등학교에 입학해 제대로 교복을 입어본 날이 몇 날인지, 친구들과 수학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하고 추억도 많이 쌓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어서 엄마는 너무 안타까웠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몸은 점점 불어나고 무기력해 보이기만 했던 네가 고2 2학기에 스포츠 관련 학과로 진로를 정하고 체육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사실 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좋았단다. 그런데 성실한 우리 아들은 학원에 거의 빠지지 않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체중도 20kg 이상 감량했잖아. '역시 우리 아들'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고. ㅎㅎ
그렇게 운동하면서 수능 공부까지 하느라 고생했는데 수능 성적이 생각보다 안 나오고 정시 경쟁률은 말도 안되게 높았으니 네가 입시를 치르며 얼마나 맘고생 했을지 짐작이 간다. 엄마는 아들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바로 옆에서 박수치며 함께 기뻐할 거야. 하지만 안 좋은 일에 대해선 너보다 먼저 몇 발짝 앞에 나가서 미리 마음 준비를 하고 널 기다려. 네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마음이든 엄마는 너와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스무 살의 지금을 마음껏 누려. 질릴 만큼 놀아도 보고, 아르바이트로 경험도 쌓고, 운전 면허도 따고, 엄마랑 여행도 가고. 그리고... 흔들리고 방황해도 돼.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알려면 이리저리 부딪쳐도 보고 오래오래 고민도 해봐야지.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 엄마가 있을 거야.
기특하게도 군대에 일찍 가겠다고 하고, 벌써 친구와 쿠팡 아르바이트도 알아본다고 하고, 운전 면허도 따겠다고 하는 네가 엄마는 고마워. 하지만 엄마 눈치 보느라 안 힘든 척, 괜찮은 척은 하지 마. 만 19세가 되지 않은 우리 아들은 아직 엄마처럼 어른이 아니잖아. 30년을 먼저 산 엄마가 지금까지 쌓아온 연륜과 지혜를 모두 모아 버티면서 기다리고 도와줄게. 엄마는 전에도 말한 것처럼 대학에 가는 것과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가는 것의 가치를 다르게 보지 않아. 오히려 성적에 맞춰 대학에 들어가고 발을 들여놨으니 2년, 4년 그냥 가보자 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두고 다양한 길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말이 너무 길어졌네. 매일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뭐 이리 할 말이 않은지... 아무튼 엄마는 아들의 '잠시 멈춤'을 응원해. 우리 함께 이 시간을 의미 있고 즐겁게 잘 누려보자.
작년 오늘, 나는 아들의 입시 결과 발표를 듣고 아들에게 편지를 썼었다. 다시 꺼내 읽어보니 지금 내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아들이 재수생으로 보낸 1년이란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들은 1년 더 열심히 운동해서 몸이 더 탄탄해졌고, 나이 한 살 더 먹은 만큼 눈빛은 깊어졌고, 엄마를 대하는 태도에는 따뜻함과 배려가 더해졌다. 그리고 나도 엄마로서 더 의연해졌고 남편은 아빠로서 더 든든해졌다. 그러니 우리 가족은 더 괜찮아질 것이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