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제주여행 1일 차
3년간 다니던 첫 직장을 퇴사를 했다. 대학 졸업 후 쉴 틈 없이 달려온 나였다. 모처럼 쉴 수 있어 좋았지만 덜컥 할 일이 없어진 것이 어색했다. 처음엔 막연히 어디를 가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졌다.
우선 서울 도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신작 영화를 감상하고, 옷 몇 벌도 샀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밀린 집안일을 하고 운동을 마치고 오면 귀한 하루가 끝이 났다. 여유로워 좋았지만 생각보다 허무했다. 서울에서의 또 다른 무료한 하루. 너무 익숙해져 색다를 것 없는 날들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원래 무색무취 음식이 몸에 좋듯, 무던하고 담백한 날들이 결국 좋은 것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나 일주일 남짓되는 시간, 내게는 탄산음료 같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상의 체기를 씻어 내리고 새로운 날들을 삼켜갈 수 있는 전환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끝끝내 망설여졌다. 주저하는 것은 나의 특기이니까. 더욱이 함께 여행을 갈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다들 취업난을 뚫고 저마다 자리를 잡거나, 혹은 그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문득 언제 이렇게 혼자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싶었다. 졸업 후 별다른 휴식 없이 근 3년을 달려온 나였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나 교환학생 한번 진득하게 다녀온 적 없고, 그저 방안에 처박혀 있다 사회에 내던져졌으니까. 그래서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더 머뭇거렸다가는 안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여행을 채 하루도 남겨두지 않은 시간에 제주행 편도 티켓과 숙소 예약을 서둘러 마쳤다. 부랴부랴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왜 내가 이러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별 수 없이 집을 나서야 했다.
김포공항은 평일임에도 북적였다. 모두 가족, 연인과 삼삼오오 함께였다. 괜히 위축되어 급히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갈증을 달랬다. 다행히 탑승이 생각보다 일찍 진행되어 정신없이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만석에 가까운 기내는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여정이 게눈 감추듯 흘러가 얼른 숙소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을 했다. 그래도 국제선보다 낮은 고도로 비행하던 제주행 기내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서울에서 반도의 끝을 그리고 망망대해를 향해 천천히 훑고 내려가는 비행기 안에서 10만 원에 가까운 비행기값이 그래도 값어치 한다고 생각했다.
비가 내릴 줄 알던 제주의 하늘은 생각보다 잠잠했다. 공항을 서둘러 나서 버스를 타러 갔다. 운전실력은 젬병인 탓에, 꼼짝없이 뚜벅이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긋하게 버스 시간에 맞춰 여행하는 것은 서울에선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었기에 그것대로 좋았다. 공항에서 급행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함덕이었다. 5년 전 제주 여행의 베이스캠프였기도 했고, 오랜만에 함덕의 풍경을 만나고 싶어 향했다. 비는 멎었지만 아직 바람은 거셌다. 눈에 바닷물이며 모래며 잔뜩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것대로 좋았다. 수제버거로 주린 배를 달랬고, 모처의 만춘서점에서 책을 두 권 정도를 구매했다. 그리고 지난번 다녀가지 못한 서우봉으로 향했다. 함덕 해변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지만 지난번 여행 때는 다녀갈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온 만큼, 이번엔 꼭 오르고 싶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탓에 땀이 쏟아졌다. 젖어가는 옷과 등에 온 신경이 곤두세워진 채 가파른 경사를 천천히 오르니 어느덧 정상에 다다랐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펼쳐진 북촌리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왜 이곳을 이제야 오게 되었을까. 왜 그때는 오지 못했을까. 그러나 부질없는 후회 대신 비로소 새겨진 첫 추억을 가슴 깊이 새기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젖은 땀을 식히고 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수풀 사이를 헤쳐가며 해변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혼자될 때는 외로움에 사무쳤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땐 이윽고 혼자가 그리워졌다. 그리하여 홀로 떠난 여행이지만, 처음엔 혼자인 것이 한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그러나 제주의 바다와 산과 들판에서 하등 부질없는 번뇌였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홀로 세상에 낳아져 홀로 돌아갈 운명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애타게 찾다 끝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다만 스쳐갈 인연들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나를 구원하고 또 자라나게 한다는 사실을. 그러니 허상과 망상에 집착하지 않고 이 삶과 자연과 운명을 축복하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일은 또 어떤 곳을 향하게 될까.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소중한 여정을 알차게 남겨봐야겠다. (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