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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희정 Oct 26. 2024

핸드폰에 저장한 남편의 이름

결혼 희망편


결혼한 친구들에게 묻기 좋아하는 질문이 있다.

“네가 병이나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어. 의식도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다고 했을 때 네 남편은 어떨 것 같아?”

그런 상상을 할 때면 구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대단히 좋지도, 처참하게 열악하지도 않은 병실에 누워있는 내가 보인다. 남편에게는 창가 옆자리를 노리고 있다가 빈자리가 생기면 간호사에게 부탁해 옮기는 약삭빠름이 없으므로 나는 다인실 입구나 침대와 침대 사이 자리에 누워있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있는 내 환자복은 등 쪽이 돌돌 말려 반쯤 걷어 올라가 있을 거고 대충 덮은 이불 밖으로 발 하나가 나와 있을 거다. 정신이 멀쩡하다는 가정하에 나는 속으로 등허리가 배긴다고 발이 시리다고 소리치고 있겠지. 머리는 자주 감지 못할 거고, 몸을 자주 돌려주지 않아 울긋불긋 욕창이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이 나를 방치한 건 아닐 거다. 매일 병실에 와서 옆에 있겠지만 내 불편을 살피는 일이 서툴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요령이 늘지 않아 가끔 오는 친정엄마가 더 능숙하게 날 돌볼 것이다. 안다면 그러지 않겠지만 알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병세가 나아지거나 심각해져도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 병간호가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훌륭하게는 아니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내 옆에 있을 것이다. 그게 내가 19년 동안 남편을 보고, 그중 12년 동안 부부로 살면서 얻은 예상 가능한 결론이었다. 과장도 비약도 없다.

이 얘기를 하면 친구들은 대부분 욕창 부분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내 남편의 건성건성에 대해 아는 이라면 더욱 눈물 나게 웃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잡아냈다.


오랜 친구 K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K의 남편은 자상하고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그동안 전해 들은 이야기도 있었지만 함께 만날 때면 K의 머리카락이 내려올 때마다 손으로 넘겨주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식사 자리에서 계속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가 딱 붙어있는 깻잎을 두 장을 젓가락으로 눌러 떼어주듯이, K의 남편의 시선은 계속 K에게 머물러 있었다.


“아마 나는 욕창은 없을 거야. 정성껏 닦아줘서 피부는 반들반들할 거고. (과연 내 생각도 그랬다) 머리고 감겨주고 잘 말려주고 묶어주기도 할걸? 대신에 나는 병원비가 밀려있을 거야.”

이번에는 내가 뒷목을 잡고 허리가 꺾이도록 웃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는 맞벌이 부부지만 그들의 갈라졌던 틈새가 대부분 돈 때문이었다는 걸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잘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또 웃음으로 상처를 희석했다. 그날 K와 나는 욕창이냐 병원비냐 누가 더 불행한지 배틀이라며 종일 눈물기 어린 농담을 주고받았다. 툭하면 다음 생을 노리면서. 우리가 잘못 뽑은 제비에 대해 얘기하길 즐겼다.


반신불수의 아내가 욕창이 생기도록 놔두는 남편을 뭘 믿고 사느냐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의 자존감을 깎아먹는 말을 아무렇지 않고 하고, 아픈 아내를 두고 홍어에 소주를 맛있게 먹는 남편과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날 딱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부에게는 그 둘만이 아는 세계가 있다. 그건 말과 글로 몇 날 며칠을 설명해도 짐작할 수 없는 깊이를 갖고 있다. 그러니 살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헤어지는 것에는 그 두 사람만이 아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남편이 어머니에게 천 냥 빚을 지는 혓바닥을 물려받았다면 나는 뭔 짓을 해도 성에 차지 않는 눈을 갖고 있다. 소리 지르고 욕하지 않는 대신 참지 않고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괄호 속의 감춰진 말처럼 (쓰레기 같은) (버러지 같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눈빛으로 침묵 속에서 죄를 캐묻는다.


나만 그랬을까, 친정에 가면 똑같은 눈을 한 엄마가 있었다. 아들 딸 한 명씩 낳아서 혼자 다 키우고, 잠 못 자고 일하고, 시부모에게까지 이렇게 잘하는 며느리 없을 거라고,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시골에 가서 고생만 한다고, 세상에서 날 가장 안쓰러워하는 게 우리 엄마였다. 물론 이런 말을 사위에게 직접 하신 적은 없다. 엄마 역시 종종 탓하는 눈으로 사위를 볼 뿐이다.

아픈 딸은 방에서 앓고 있는데 거실에서 홍어에 소주를 (처) 먹는 자신의 남편과 딸의 남편을 쌍으로 봐야 하는 엄마의 몸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리가 생겼을까. 그리고 장모님과 아내의 눈빛을 견뎌야 하는 남편은 어땠을까.


그 눈빛을 견딘 건 남편의 ‘무던함’ 덕분이었으리라. ‘배려와 희생’이 없는 남편에게는 ‘책임감과 무던함’이 있었다. 그가 갖지 못한 것을 떠올리면 끝없이 불행해졌으므로 나는 자주 그가 갖고 있는 것들을 떠올리며 위안 삼았다. ‘예민함’으로 세상 모든 말끝이 상처이고 감동인 나에 비해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대응하는 담담한 태도는 우리 부부를 위기에서 여러 번 꺼내 주었다.


아무도 모르는 바닷가 마을에 가서 혼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불행을 하소연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갑자기 사라진 장인어른을 대신해서 주말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건물 공사에 관여해야 했을 때,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제3금융권에 이름 석 자를 적고 수억 원의 돈을 빌려야 했을 때. 그 손 떨리는 사건 사고들을 통과했던 지난날 그의 책임감과 무던함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내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나 상종 못할 인간이라 생각해서 분노하게 만드는 인간도 그에게 털어놓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 사람도 있는 거야로 변했다. 자신의 기준을 앞세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은 덕분에 시야를 넓게 볼 수 있었다.


열렬히 사랑하다가도 수틀리면 뭐든 떼어놓고 나락으로 떨어질 준비가 되어있는 나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곁에 있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매번 수렁에서 건져 올리는 그. 한동안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 남편을 멘털코치로 저장해 놓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그냥 ‘남편’으로 저장해 놓는다. 딱히 애칭 같은 것으로 부르고 싶지도 않고 하트 따위는 더더욱 붙이지 않는다. 혹시나 나에게 사고가 났을 때 낯선 사람이 연락처에서 남편을 찾기 수월하도록 저장해 놓았을 뿐이다.)  


나에게도 있는 것이 있었다. 참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열심히 살면서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을 때는 한 번씩 쓰러졌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내 몫이라면 앓는 소리 없이 감내하는 것은 내 특기였다. 그러니 우리 부부 사이에서 한 번도 ‘이혼’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둘째 아이를 낳자마자 후처치를 받으며 남편에게 ‘봤지! 애 낳는 게 이런 거라고. 그러니까 이혼해도 애는 내가 키울 거야. 빨리 동의해.’라는 말은 한 적은 있지만.)


10년 넘게 살면서 이혼 위기가 왜 없었겠냐만은, 머릿속으로야 백 번도 넘게 상상했어도 구체적으로 결심해서 실행하거나 홧김에 내뱉어 본 적은 없다. 아마두 우리 중 한 명이 정말 이혼을 결심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책임감이 강한 남편과 참을성이 좋은 내가 말하는 이혼은 말 그대로 결혼생활의 종결을 의미할 테니까. 다시 잘 지내보는 계기가 된다던가, 본보기를 보여줘야 할 때 쓰는 무기는 결코 아닐 것이다. 매번 실망하고 아주 가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아직 이혼이라는 카드를 꺼내지 않고 살고 있다.


남편과 한바탕 싸우고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도 남성복 세일 현수막을 보면 자연스럽게 가게로 흘러들어 가 남편의 옷을 골랐다. 분노의 카톡을 장문으로 보내놓은지 30분 도 안 되어 ‘당신 티셔츠 100? 105?’이라고 물으면 사라지지 않던 1이 없어지고 바로 답장이 왔다. ‘100 살 뺄 거야’


먹는 건 처먹는 걸로 보여도 뭘 먹는지 잘 먹는지는 여전히 내 관심사였다. 빨래를 개키다가 남편 옷을 바닥에 패대기친 적은 있지만 저렴한 가격에 파는 5장 묶음 러닝셔츠를 발견하면 번개처럼 장바구니에 넣었다.


부부로 10년을 넘게 살면 네 것 내 것과 네 몸 내 몸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누가 나무인지 버섯인지 모르고 한 몸으로 산 지 오래된 탓이다. 누가 누구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의 가장 절대적인 존재라는 거였다. 그래서 가끔 의무와 책임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반반 결혼을 꿈꾸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의문이 들었다. 이 세대의 부부는 또 다른 모습일까 궁금했다. 동거인이라면 몰라도 내 시대의 부부에게 반반이란 불가능했다. 나에게 결혼이란 크기와 색이 다른 색깔 점토 두 개를 나눠주고 빼앗기고 더 크게 받았다가 뭉개고 쪼개고 합쳐서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어진 한 덩어리의 색깔 점토 같은 것에 가까웠다.




*메일리 뉴스레터 '마흔 일기'로 발행한 글입니다.

https://maily.so/moonzakka/posts/cb22cc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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