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쉐어하우스가 말하는 독립이란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낯설게 느껴졌던 것 중 하나는
쉐어하우스였다.
스페인어로는 'piso compartido'.
처음엔 단순히
학생들만의 주거 형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30대는 물론이고,
40대, 심지어 50대도
이런 식으로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월세가 비싸서 그러겠지"라고 생각했다.
바르셀로나 같은 도시는 실제로 렌트비가 꽤 높고,
Eurostat이나 Idealista 같은 통계 사이트를 보면
스페인 내에서도 월세 부담이 큰 도시로 꼽힌다.
그러니 나는
경제적인 이유로 방 하나씩 나눠 사는 거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구조가 단순히 '비용'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스페인 언론에서도
"piso compartido no es solo por el dinero
(공유 주거는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다)"라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누군가와 함께 사는 걸 통해 고립감을 줄이고,
일상 속에서 유대감을 나누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흥미로웠던 건,
이곳에서는 교수나 엔지니어,
혹은 프리랜서처럼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도
piso compartido를 선택한다는 점이었다.
내 지인 중 한 명은
38세 프랑스 여성인데,
IT 회사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쉐어하우스에 산다.
이유를 묻자,
"혼자 사는 건 너무 조용해서 싫다"고 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그녀는
주말마다 룸메이트들과 테마 음식을 준비하고,
서로 자국 요리를 소개하는 식사 모임을 연다.
그들에게 이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다.
스페인은 개인주의 사회다.
하지만 한국에서 말하는 개인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교적인 개인주의'라는 말이 어울린다.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지 않되,
필요할 땐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하는 분위기.
반면 한국에서는 '쉐어하우스에 산다'는 말이
아직도 미성숙함이나 경제적 궁핍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부동산 중개소에 집을 보러 갔을 때,
내가 ‘방 하나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있다’고 말하자
중개인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요즘은 다 혼자 살지 않아요?"
친구들 중에도
"이제 나이도 있는데 아직도 룸메이트랑 살아?"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독립이란, 곧 '개인 소유의 집'이라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선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독립을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혼자만의 공간을 갖는 것'으로 정의한다.
한국 사회는 단순히 '가족과의 분리'만으로는
독립이라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공간을 책임지고 소유하거나,
임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으로 인정받는다.
그에 반해, 스페인에는
'familismo débil', 즉 '약한 가족주의'라는 개념이 적용된다.
부모와 함께 살다가
룸메이트들과 살아가는 삶 역시
하나의 독립된 삶의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중요한 건 누구와 사느냐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꾸려가는가이다.
30세가 넘어서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많은 스페인이지만,
동시에 이들은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진 삶' 자체를 독립으로 간주한다.
팬데믹 이후,
독립과 관계에 대한 인식은 더 유연해졌다.
특히 40대 이상 성인을 위한 쉐어하우스,
'coliving para adultos(성인을 위한 공동 주거)' 같은 형태도 점차 늘고 있다.
몇 달 전,
'공동 식사'와 '정원 가꾸기'를 테마로 내세운
마드리드의 Coliving 커뮤니티 광고를 본 적이 있다.
혼자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적당한 거리의 동료들"과 사는 일상을 제안하는 방식이었다.
살라망카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
여섯 명이 함께 사는 쉐어하우스에 머문 적이 있다.
화장실은 두 개였지만,
아침마다 줄을 서야 했고
거실과 부엌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다.
그 집에 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요리를 하지 않았다.
주방에서 룸메이트를 마주치는 게 싫었고
불필요한 대화를 피하고 싶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일보다
그 안에서 나를 열어야 하는 감정 소모가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빵이나 과일 같은 간단한 음식을
방에 들고 들어가 조용히 해결하곤 했다.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거의 모든 순간을 혼자 보냈다.
그때 나는,
쉐어하우스의 낭만보다
그 공간이 요구하는 사회적 체력을 먼저 체감했다.
결국, 혼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나는 piso compartido를 나왔다.
작은 방 하나를 구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나무 창문 틈으로 겨울바람이 그대로 들이쳤다.
히터를 아무리 틀어도 벽은 차가웠고,
밤마다 잠을 설쳤다.
신체적인 추위도 힘들었지만,
더 힘든 건,
그 모든 걸 혼자 견뎌야 한다는
마음의 냉기였다.
결국 나는 친구 파티마의 집으로 옮겨,
두 달 남짓 함께 살게 되었다.
그녀의 집은 작고 오래됐지만,
거실에는 늘 누군가의 온기가 머물렀고,
밤이면 룸메이트들과 둘러앉아
피자를 시켜 먹거나 따뜻한 차를 나눴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웃으며 하루를 마무리한 날도 많았다.
그곳에는,
누군가와 나누는 따뜻한 온기,
말 한마디로 마음이 녹아내리는
서로의 체온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조금 다르게 ‘함께’를 정의한다.
함께 살아도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필요할 땐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주고받는,
그런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독립적이고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누구와 살든,
그 관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상을 꾸려가는지가 더 중요하다.
어쩌면 진짜 독립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쉐어하우스든, 1인 가구든,
혹은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삶이든,
그 안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건 누가 봐도 분명한 독립이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연결되기를 바란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감정은, 사실 함께 존재할 수 있다.
혼자 살면서도 외로울 수 있고,
여럿이 함께 살아도 깊이 고립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공간의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점이다.
'쉐어하우스'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선입견 대신,
그 방식이 어떤 이들에겐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삶을 선택하든 그 선택을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내 안의 가치로 판단할 수 있는 용기.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어른스러움은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