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싸운 적이 있었나?” 그에게 물었다.
문득 며칠 전, 남편이 토라져서 이불을 꼭 끌어안고 툴툴거리며 잠들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는 저녁 식사 후에 아이스크림을 먹곤 하는데, 그날은 못 먹게 했던 날이었다. 그의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왔던 탓이었다. "오늘은 안 돼. 우리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려면 건강을 챙겨야지요." 그날만큼은 식후 아이스크림을 그냥 눈감아줄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남편은 입술을 오리처럼 쭉 내밀곤 발을 동동 거리며 토라진 티를 냈다. 그게 어처구니없고 귀여워서, 그의 토실토실한 뱃살을 통통 치고, 볼을 양쪽으로 잡고 아코디언처럼 늘리며 웃어넘겼었다. 근데, 그건 싸움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생각해 보니, 내가 심통을 냈던 적도 있었다. 한참 결혼을 준비하던 때였는데, 종일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퇴근하고 온 날이었다. 시니어 직급인 나는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의 업무 우선순위까지 정해주어야 할 때가 많은 편이다. 근데, 그날은 그 정도가 대단했다. 작은 일부터, 아주 큰 일까지, 모든 직원들이 내 선택만을 기다렸다. 그들의 의견을 들으며 A안과 B안을 비교하며, 최선의 선택을 하고, 또 선택하고, 또 하고…… 녹초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말했다. 신혼집에 들일 가전제품을 함께 고르자고. 그 선택이 버거웠다. 안 그래도 이미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신부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선택을 쳐내는 중이었다. 미간에 힘을 주고 서글퍼진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나 요즘 선택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아요. 힘든 거 같다. 그러니까 이거는 오빠가 알아서 해줄래?” 놀란 그는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며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고 토닥였다. 이것도 싸운 건 아니겠지?
“결혼하기 전에 한 번쯤은 싸워봐야 한다던데, 진짜 싸운 적 없어?” 친구가 물었다. 기억 세포를 하나하나 꺼내서 살펴봤다. 아무래도 내 머릿속에는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싸운 기억 조각이 없는 듯했다. 누군가 삐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거나, 서운하고 힘든 일이 생겨서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은 있어도, 화를 내며 싸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내 관점일 수 있으니, 남편에게도 물었다. 우리가 싸운 적이 있냐고. 그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우리는 안 싸웠지."
“누가 그러는데, 한 번은 싸워봐야 한대.” 이어진 내 말에 그가 웃었다.
“우리는 그 전에 솔직히 대화를 하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안 싸울 거야.”
맞다, 그게 우리의 방식이었다. 우리는 처음 만난 날부터 말이 잘 통했었다. 평소 소개팅을 하면 식당에서 밥만 먹고 헤어지곤 했었는데 그와는 달랐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근처에 늦게까지 하는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고도 아쉬워져서, 집 앞에 데려다주겠다는 그의 말에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이 되도록 우리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악, 영화, 소설, 여행, 음식, 그리고 서로의 인생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다음날, 그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를 들으면서 얘기하고 싶어요.” 첫 통화는 무려 3시간 21분, 약 200분을 채우고 나서야 끊어졌다.
그때의 대화가 여전히 이어지는 중이다. 매일 밤마다 제발 그만 말하고 자자, 라고 해놓고 3초도 안 되어서 다시 말을 쏟아내는 걸 반복한다. 속마음을 홀라당 꺼내어 서로에게 투명하게 보여주는 밤들이 셀 수 없이 많아지고 있다. 어쩌면 그런 순간들이, 남편에게 우리가 평생 싸우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을 만들어주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앞으로도 싸우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충분히 대화를 하면서 살아갈 거 같긴 하다. “어이구, 귀에서 피나겠다! 넌 정말 말이 많아, 이 수다쟁이야”라고 지금처럼 장난을 치면서 말이다.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오빠가 말이 많네, 아니네, 네가 진짜 진짜로 더 말이 많네 하면서 지금처럼 즐겁게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