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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끼리 살아서 좋았던 점

by 윤모음

깜빡했다. 습관처럼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않고 샤워를 끝내버렸다. 화장실 한쪽에 벗어둔 옷은 이미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방금 막 개운하게 샤워를 했는데, 그 옷을 또 입고 싶진 않았다. 문을 살짝 열어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바깥을 살펴봤다. 문 바로 옆에 있는 화장대에서 남편이 스킨로션을 바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빠, 잠깐만 눈 감고 있어 봐. 절대 눈 뜨면 안 돼! 알았지?” 내 말에 그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장난을 치려고 눈을 뜰까 봐 불안해진 나는, 수건을 길쭉하게 늘어뜨려서 몸 앞부분을 가렸다. 그리고 건너편에 있는 원목 헹거로 달려갔다. 최대한 신속하게 걸려있던 새 잠옷을 집어 들고, 아래에 있는 수납장에서 속옷을 꺼낸 후 화장실로 다시 뛰어 들어왔다. 새 옷을 갈아입은 후에야 안심하고 화장실에서 편히 나올 수 있었다.


엄마와 언니, 그리고 나까지, 우리 셋은 여자끼리 꽤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 누가 씻고 있든 “나 잠깐 들어간다!”하고 말한 후 선반에 있는 생리대만 후딱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이번처럼 갈아입을 옷을 안 챙겼어도 맨몸 상태를 뽐내면서 이방에서 저 방으로 활보했다. 그럴 때마다 언니와 나는, 서로를 보면서 “아, 왜 저래! 저 인삼 같은 몸은 뭐야!”라고 소리치며 기겁을 하긴 했지만. 편한 건 그것뿐이 아니었다. 생리 현상도 대체로 자유분방했다. 서로 방귀대장 뿡뿡이가 빙의되어 뿡빵뿡빵거리며 배를 잡고 웃은 적도 많았다. (지금 나는 신혼이기에, 남편에게 생리현상을 오픈하지 않았다. 그렇다, 아직은 신비롭고 싶다.) 빨래를 하고 난 후 속옷을 널어두는 것도 편했고, 배가 슬금슬금 아파오는 생리통에 대해서도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었다. 언니와 나는 서로 좋은 화장품이 있으면 사다 주면서 추천해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서로의 가방을 뺏어 들거나, 서로의 옷을 빌려 입으며 자매의 특권을 맘껏 누렸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기회를 누리는 것은 쉽지 않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남자 사람과 살게 되면서 뜻하지 않게 어쩐지 조금 신경 쓰이고 아쉬운 부분들이 생겼다.


아쉬운 것 중에 최고는 바로 사우나를 함께 갈 수 없다는 점이다. 목욕탕에선 남탕과 여탕으로 갈리니, 남편과 가더라도 결국 혼자서 목욕탕에 들어간다. 그게 조금은 외롭고 심심하게 느껴진다. 온탕과 사우나를 번갈아가는 경험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게 참 아쉽다. 신발장 앞에서 “몇 시까지 여기서 만나자”라고 정하니 예전처럼 즉흥적으로 여유를 부리며 목욕시간을 늘려 즐기기도 애매하다. 시간 약속도 정하지 않고, 함께 목욕을 하러 가서 등도 맘껏 밀어주고,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며 맘대로 놀 수 있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편안했던 건지.


얼마 전, 엄마와 언니가 단체 카톡방에서 목욕탕 가는 약속을 잡길래, “나도!! 나도 갈래!!”라고 외쳐버렸다. 그리고 남편에게 “나 목욕 다녀올게!”라고 한마디 남기고 쏜살같이 나갔다. 예전에는 엄마와 언니랑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사우나에 갔었다. 깨끗하게 샤워를 끝내면 온탕에 들어가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서 피로를 풀었다. 목을 뒤로 기대어 가만히 있으면 모든 고됨이 머리 위로 아지랑이를 피우며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매점에서 구매한 얼음이 한가득 들어있는 아이스아메리카노 통을 들고, 서로 번갈아가며 커피를 쪽쪽 마셨다. 찬음료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 들면 다시 온탕에 들어가 앉았다. 온탕에서 나왔다면, 그다음 코스는 건식 사우나였다. 우리는 준비된 마사지 소금을 몸에 조금 바른 후, 분홍색 모래가 담긴 모래시계를 쳐다보며 그저 시간이 흐르는 걸 지켜봤다. 아주아주 여유롭게 말이다.


이번에도 엄마, 언니와 샤워볼에 비누칠을 하며 꺅꺅 돌고래 소리를 내며 결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꿀밤 한 대 날리고 싶은 직장 상사 욕도 하고, 온탕에 나란히 앉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요즘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오기 전에는 찬물에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마시지 탕에서 등을 세차게 때려대는 물살에 몸을 맡겼다. 아주 오랜만에 완벽한 목욕을 만끽했다.


재작년에 우리는 통영에 놀러 갔다. 방 한쪽에 대형 욕조가 있는 오션뷰 숙소를 예약했었다. 야외 수영장에서 놀다 들어와 수영복을 벗고 샤워만 후다닥 끝낸 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 같이 맨몸으로 대형 욕조에 들어가서 바다 너머로 해가 지는 걸 바라봤다. 그땐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편안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는지, 이젠 또렷하게 느껴진다. 여자끼리 살아서 가장 좋았던 점은 언제나,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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