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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Oct 21. 2022

사라지는 날들

과 사라지지 않는 마음

    4월이 되자 벚꽃이 한차례 피고 졌다. 올해는 올해 나름의 이유로 만개한 벚꽃을 보지 못했다. 아쉬워하다 보니 4월 말이 되었고, 계약 종료를 한 달 남겨두자 집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엔 고민 없이 연장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동안을 뒤돌아보니 11월부터 시작해 다섯 달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우연과 희망에 기댄 계획들은 모두 실패했고, 한 달이라는 시간만 남았다.


    내가 여기 와 이루려던 것은 글을 완성하는 것, 직업을 얻는 것, 운전을 하는 것 세 가지였다. 반쯤 쓰다 내팽개친 소설들은 영종도에 와서 조금도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쓰는 이 글만큼은 완성될 것이다. 직업은 얻지 못했으며 과거에 시간을 팔아 벌었던 돈을 바닥까지 긁어 썼다. 이제는 뜨거운 물을 부어 바닥을 불려야 할 정도다. 운이 좋아 친구 차를 가끔 몰아봤으나 도로 위에 혼자 나갈 실력은 얻지 못했다. 셋 중 가장 아쉬운 건 아무래도 운전이었다. 영종도의 좋은 도로를 두고 운전을 멀리했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취업을 해 영종도를 떠나는 건 어그러졌으니 대신 운전을 위한 작은 목표 하나를 세우고 영종도 살이를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옷장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었다. ‘운전해서 학원에 가 수료증 받아오기’. 수업은 끝이 났지만 실물로 된 수료증은 만들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내 계획은 이랬다. 수료증이 나온다는 날까지 최대한 운전을 연습하다가 그날이 오면 직접 차를 몰아 다녀오는 것이다. 결심을 하자마자 보험률을 최대로 적용한 쏘카를 한대 빌렸다. 쿠팡에서 초보운전을 알리는 자석을 두 개나 샀다. 운전 연습을 앞두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려는데 돌연 학원에서 카톡이 왔다. ‘수료증이 나왔으니 찾아가세요’. 아직 포스트잇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아직 차 시동도 걸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시험 범위를 다 읽지도 못했는데 당장 다음날 주관식 시험을 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계획까지 틀어지는 걸 느끼며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다음날 아침 6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깼고,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서 다시 잠에 들었다. 차는 10시부터 대여했는데 결국 11시가 넘어 일어났다. 정말 무서웠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게 아닐까. 혼자 운전하는 일이 정말 무서워서 차를 당장 반납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결국 나를 움직이게 만든 건 조금 더 지체했다간 점심시간에 걸려서 도로에 차가 늘어날 거라는 생각이었다.


    차를 빌리는 곳에 가보니 고맙게도 후면 주차가 되어있었다. 꼭 전면주차를 해달라고 안내사항에 적혀있었는데 누군가 그걸 어겼다. 나는 이전 사용자가 차를 잘 반납했다는 칭찬카드를 보냈다. 덕분에 걱정을 하나 덜어 안도하고 있는 나를 보고 관리실 아저씨가 반납할 때는 꼭 전면주차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차를 타 버튼을 하나씩 눌러보고, 후방 카메라가 왜 안 켜지는 건지 몇 분간 고민하다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울상이 된 채로 출발했다. 탈출이 용이하도록 양쪽 창문을 모두 내렸다. 


    익숙한 넓은 도로에 올라서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혹여라도 내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근처 운전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학원에서 커피 친구와 넘어오던 길을 이제는 나 혼자 거꾸로 찾아간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미약하게나마 성장한 기분도 들었다. 곧이어 학원이 있는 복잡한 건물단지로 진입했다. 눈치껏 잠시 정차하려는데 어디다 세워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결국 이미 주차해있는 차를 찾아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시동을 끄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바로 세우며 걸어 나왔다. 곧장 학원에 올라가 수료증을 받아 나왔다. 강의실에서는 내가 그랬듯 새로운 수강생들이 실습을 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내가 있던 곳인데 생각하자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든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퇴사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난 아직까지도 직장을 그만두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서랍 속에 짐을 하나하나 꺼내 복도에 잔뜩 쌓아놓고 바닥에 앉아 하나씩 정리를 한다. 서랍에 담겨있었다곤 믿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겨울 니트가 나오고 자잘한 필기도구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서랍의 저 끝에는 내가 대학생이 되기도 전에 선물 받아 이십 대 내내 들고 다닌 낡은 녹색 지갑이 끼어있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여기 있었네. 나는 얼굴을 돌리고 날개 죽지가 찢어질 정도로 팔을 쭉 뻗어서 지갑을 꺼낸다. 그러던 중 나와 일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나를 발견한다. 아직도 안 나갔어? 하는 눈빛이다. 그만뒀다더니 왜 아직 여기 있어? 회사는 전보다 더 잘 돌아가고 사무실은 전보다 더 좋아졌다. 사람들은 기억보다 더 즐거워 보인다.


    수료증을 받아 들고 곧바로 내려왔는데 고작 몇 분 사이에 내 차는 샌드위치 상태에 빠졌다. 내 뒤로 트럭 하나가 주차를 한 것이다. 왜 하필! 머리가 하얘졌는데 그 트럭이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차를 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도로에 민폐가 될까 봐 되는대로 오른쪽 연석에 붙여 주차했는데 바퀴가 연석에 거의 닿을 정도여서 핸들을 꺾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몇 미리도 없는 그 틈에 모든 희망을 걸고 앞으로 찔끔 뒤로 찔끔 거리며 내면으로 울고 있었다. 출발 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후방 카메라는 너무 잘 작동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십 분간 그렇게 쩔쩔매는 걸 근처에서 봤던 것인지 동시에 앞 뒤 차량이 모두 빠져나갔고 그제야 연석에 올라타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반납 전에 근처 공터에 들려 전면주차 연습을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아무 도로나 골라 타서 달렸다. 그러다 외딴 주요소에 들려 주유를 했는데 다행히 직원이 있는 곳이었다. 반납 시간에 맞춰 여유 있게 돌아왔지만 놀랍게도 오피스텔 주차장 입구를 찾지 못해서 같은 동네를 다섯 번 정도 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반납 시간을 몇 분 넘겨서 주차를 하려는데 운 나쁘게도 뒤에 따라 들어온 차가 있었다. 먼저 지나가라고 옆으로 비켰지만, 알고 보니 1층에 주차를 하고 싶어서 나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한번 더 속으로 울었다. 다행히도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얼렁뚱땅한 각도로 시작해 제법 빠르게 주차를 끝냈다.


    모든 걸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가 영종도에서 해야 할 일은 이제 끝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기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고 아주 무서울 줄 알았는데 막상 운전대를 잡고 나니 자전거를 타듯 자연스럽게 핸들을 잡고 엑셀을 밟게 되었다. 김이 빠진 미지근한 성취감만 느껴졌다. 침대에 벌렁 누워 들고 온 파란 수료증을 쳐다봤다. 이게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바닥에 던져버렸는데 그 안에 꽂혀있던 플라스틱 카드가 툭 떨어져 나갔다. 이 방을 시작으로 일어난 지난 영종도 생활을 돌아봤다. 아무짝에 소용없이 흘러간 시간이었다. 제값을 하고 쓸모를 증명하듯이 살던 때 나는 자주 불행했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내가 인간이 맞는지 고민하던 시간에서야 가끔 불행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자연 속에 파묻힌 식물을 들여다보자 행복했다. 가만히 멈춰있는 산을 봐도 행복하고 그 안에 풍성한 잎을 달고는 출렁출렁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는 지금도 행복하다. 힘들었던 때 내가 유일하게 바라던 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조용한 집에서 멀리 창밖으로 산이나 바다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일이었다. 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어서야 내 상상과 스케일은 많이 다르지만 문장 그대로의 삶이 현실이 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것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도 내 현실에 속속 들어와 내 행복의 진정성을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코니 바닥에 깔린 인조잔디의 푸른색이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을 계절이 되고 나서야 이 집을 떠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플라스틱 비닐의 촉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실감 난다.


    처음 이사오던 날 창밖으로 텅 빈 공사판이 있었다. 하나였던 민트색 크레인은 벌써 세 개나 된다. 훗날 이 방에 다시 온대도 내가 보고 있는 산은 아파트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건 모두 사라진다. 시간도 공간도 쉽게 사라진다. 그 와중에 잘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글을 쓰려는 마음, 좋아하는 걸 해내려는 마음,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가난하더라도 행복하게 살겠다는 마음 같은 것이다. 이런 마음은 너무 자연스럽지만, 그래서 의심스럽고 마음이 아니라 다짐이 되어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다. 머리 위로 넓은 구름이 슬그머니 흘러간다. 하늘을 다 뒤덮을 정도로 크다. 그 아래 나는 얼마나 작은 인간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저 도로 아래 굴러가는 차들은 작다. 산을 뒤덮은 나무는, 나무도 작다. 건너편 건물의 창문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공사판 망치질 소리도 작다. 또렷한 글자를 남기려는 손가락만 보고 타자 치는 소리만 듣는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마음 때문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산 영종도의 반년을 이렇게 남겨본다. 


(끝)



바라는 것과는 조금(많이) 다르지만, 얼추 이루어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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