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여의도 '광장'을 찾아서
하필이면 겨울이다. 건물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강바람은 그 사이를 지르며 매서워진다. 겨울, 여의도는 바깥 활동을 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집회는 더더욱 그렇다. 국회 앞 집회에 처음 참석했다 날카로운 추위에 놀랐다는 이들의 반응을 소셜 미디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게다가 국회 앞에는 시민들이 모일 공공 공간이 없다. 산업은행 앞 인도가 넓은 편이라 집회 장소로 쓰이지만 그곳은 광장이 아니다. 경찰은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 대신 10차로, 너비 100미터인 의사당대로의 차량 통행을 통제해 집회 장소로 관리한다. 그런데 의사당대로의 중앙에는 교통섬이 있고, 키 큰 소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다. 대로의 절반은 여의도 공원 방향으로 가면서 지하차도로 연결된다. 집회 때 통신사의 이동기지국 역할을 하는 대형 버스까지 도로 곳곳에 놓이면 아스팔트 도로 위에선 주최 측의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앞은 주권자인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기엔 옹색한 공간이다. 그렇다고 시민들은 여의도 공원에 모이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14일 한국일보가 360도 카메라로 촬영한 집회 사진을 보면 시민들은 공원보다는 차라리 국회 쪽 건물 사이, 아스팔트 도로 위를 택했다. 건립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던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가장 컸던 여의도 광장의 공간 구조는 어쩌다 이렇게 어긋난 것일까. 여의도 도시계획에 국회의사당과 연결된 광장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까.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태생부터 계엄과 얽혀있다. 광복 후 제헌 국회는 조선총독부였던 중앙청을 의사당 삼아 출범했다. 6.25 전쟁 중에는 전국을 전전하다 서울 수복 후에는 태평로의 시민회관 별관에 자리 잡았다. 새 국회의사당 건립을 본격 추진한 것은 4대 국회로, 1958년 11월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신축하기로 계획을 확정했다.[1] 대상지는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로, 신궁광장은 일제강점기 수만 명을 동원한 대중집회가 자주 열리던 장소였다.[2]
[남산 국회의사당 추진 일지]
1958년 11월, 4대 국회,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 추진
1958년 11월, 4대 국회,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 추진
1959년 5월, 남산 부지정지공사 기공식
1959년 11월,
국회의사당 현상모집에 김수근 설계안 당선
의사당 12,000평, 의원회관 16,000평, 도서관 3,000평 등 연건평 33,400평 규모
1961년 5월, 5.16 군사쿠데타로 국회 해산
1962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 남산 국회의사당 터 공원으로 환원 결정
그런데 실시설계가 한창이던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다.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6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5대 국회를 해산시키며 일체의 집회를 금지했다.[3]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은 중단됐고, 1962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남산 국회의사당 예정 부지를 공원으로 환원하기로 최종 결정한다.
강신용과 장윤환은 이런 결정이 “기성 정치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군사정권이 정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 신축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1] 국회의사당이 무산된 부지에는 잔디밭이 깔리고 야외음악당과 어린이 놀이터, 시립도서관이 잇따라 조성되는 등 도시공원이 만들어졌다. 남산공원은 군사정권이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혁명시정’의 하나로 시행한 도시공원 정책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국회의사당 신축 논의는 4년이 지난 1966년 6대 국회가 의사당건립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재개됐다. 한강개발계획을 세운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여의도 개발에 ‘미쳐있었다’고 전한다.[4] 김 시장은 방사순환형인 기존의 서울 도시계획을 개의치 않고 여의도를 서울의 핵심으로 삼고자 했다.
한국기술개발공사의 김수근은 이 구상을 도심과 인천을 연결하는 도시축에서 여의도가 주요 거점이 되는 선형확장론으로 구체화시킨다.[5] 여기에 국회가 여의도로 국회의사당 이전을 결정하면서 여의도 개발에는 더욱 힘이 실린다. 김수근은 1968년 보행자 전용의 인공 데크로 연결되는 상업·업무지구, 국회·대법원·서울시청을 이전하는 행정 특별지구, 나머지 주거지구 등으로 구성한 여의도 개발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식민지 유산인 도심 근대식 건물에 있는 관청을 여의도의 빈 땅으로 옮겨 재배치하는, 사실상 새로운 수도를 표상하는 공간을 조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6]
초기 계획안을 보면 국회지구 안, 지금 국회박물관 자리에 국회광장을 배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광장은 서울시의 구상에 따른 것으로, 서울시는 8만 평 정도의 부지에 ‘민족의 광장’을 마련하고 경기장, 수족관, 동·식물원, 도서관, 음악당, 미술관 등을 민간자본으로 조성하길 바랐다고 한다.[4] 이에 더해 마포와 영등포를 잇는 남북간 도로의 지상 부분에 선형의 중앙 광장과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세 개의 광장이 계획됐다. 모두 공원의 성격을 갖는 광장으로, 특히 중앙 광장은 여의도의 상업·업무지역이 동서로 단절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수근이 1969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사장에서 물러나고 이듬해 김현옥 시장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경질되면서 이 계획은 백지화됐다.
김수근의 초기 계획안은 서구와 일본의 도시계획을 여의도에 적용한 대담한 시도였지만 서울시의 재정 여건으로는 실현 불가능했던 계획이었다.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이었던 손정목은 “너무 지나친 도시 계획이어서 택지 매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4] 대법원이나 해외 공관과 협의 없이 이전 계획을 발표한 것도 서울시와 계획가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서울시는 토지 매각 과정에서 땅값을 이유로 국회의사당 인근의 공관지구와 상업지구 일부를 주거지구로 전환하는 등 도시 기능을 고려했던 계획을 폐기했다. 정인하는 “1960년대 서울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이 효율성과 경제성을 바탕으로 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사라지고 여의도는 무질서한 도시 지역이 되어버렸다”고 평가한다.[5]
여의도 광장의 성격과 규모를 바꾼 것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었다.[7] 손정목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1970년 양택식 당시 서울시장을 불러 여의도 도면에 붉은 색연필로 광장 구획선을 직접 그렸다고 한다.[4] 화단이나 녹지가 없는 거대한 아스팔트 광장을 만들라는 지시였다. 1971년 한국도시 및 지역개발소가 다시 만든 마스터플랜에는 광장이 중앙으로 옮겨지면서 39만 6천㎡(12만 평)로 확대되고 공원형 시설은 모두 사라졌다. 김수근의 초기 계획안에 있던 상업·업무지역도 쪼개지고 여의도의 동서 생활권이 단절된다.
여의도 광장은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로 만들어졌는데, 그 의도에 대해서는 추측이 분분하다. 전시 비상 군용 비행장 용도라거나, 탱크, 장갑차 등의 군사 퍼레이드에 대비한 것이라는 추정이 있고, 박 대통령이 직접 명명한 ‘5.16 광장’이란 이름으로 미루어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부각하기 위한 기념 공간이라는 분석도 있다.
장세훈은 광장이 남북한의 체제 경쟁이 치열한 시기에 조성됐다는 점에 주목한다.[7] 북한은 1954년 평양에 7만 5천 제곱미터, 10만여 명을 수용하는 김일성 광장을 만들었다. 자본주의 도시 구조를 비판하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은 도시 중심부를 노동자들에게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중앙광장을 조성하고, 주민을 동원한 각종 행사를 열어 체제 선전에 활용했다.[8] 이런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여의도에 평양보다 큰 광장을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자본의 도시 여의도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사회주의 광장보다 5배나 큰 아스팔트 광장은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의 산물이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은 이 광장의 성격을 다시 한번 변화시킨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과의 단절을 강조하며, 5.16 광장의 이름을 '여의도 광장'으로 바꿨다. 그러나 여전히 대규모 관제 행사가 주로 펼쳐지던 '여의도 광장'은 1987년 민주화를 거치면서 비로소 시민 참여의 공간으로 변모한다.[7] 1995년 첫 민선 서울시장으로 당선한 조순 시장은 '여의도 광장'의 공원화를 추진했고 1999년 여의도 공원이 공식 개장해 오늘에 이른다.
오늘 점심엔 계엄의 밑그림이 깔린 동선을 벗어나 국회로 산책을 나가본다. 여의도 초기 계획안에 국회 광장으로 배치됐던 자리엔 헌정회와 국회 박물관이 있다. 국회 출입 기자를 했어도 거의 갈 일이 없던 외딴곳이다. 근처에는 야외 행사장으로 쓰이는 한옥 ‘사랑재’와 북카페 ‘강변서재’가 있는데,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다. 데크에 오르면 한강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광장이 마련됐더라면 강변까지 연결해 수변공간으로 활용했을 법한데, 지금 둔치는 주차장으로 쓰인다. 국회 경내에는 곳곳에 숲과 정원이 가꿔져 있지만, 함께 나온 동료들에게도 국회는 여의도 공원에 비해 친숙한 산책로는 아니다. 입구에 서 있는 경찰은 위압감을 주고 경내는 ‘일하던 곳’이라는 느낌을 준단다. 산책 동선에 따라 소요 시간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공간이 아니기도 하다. 아무려나 잔디가 깔린 공터마다 견학 온 유치원생들이 까르르 뛰어다녔다.
*참고문헌
[1] 강신용·장윤환 2004, <한국근대도시공원사>, 대왕사, 279~292쪽.
[2] 김백영 2018, “육백 년 고도 서울의 광장문화에 대한 회고적 성찰”, <공공의 리듬, 공동의 몸 : 공동체 아카이브> 도록, 일민미술관.
[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item/cons/level.do?levelId=cons_006_0020_0020_0030
[4] 손정목 2003, <서울도시계획이야기 2>, 한울, 9~96쪽.
[5] 정인하 1996, “여의도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2권 2호.
[6] 전진성 2015,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 천년의 상상, 593~598쪽.
[7] 장세훈 2016, “광장에서 공원으로 : 5·16 광장 변천의 공간사회학적 접근”, 공간과 사회, 26권 2호.
[8] 정인하 2021, “평양 김일성 광장의 조성과 계획원칙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37권 6호.
이 글은 도시관측 챌린지 100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