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어김없이 사장님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타 부서 임원분의 전화가 왔다.
“인사님, 지금 어디신가요?
제가 사원증을 놓고 화장실을 왔다가,
사무실 밖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어서요.”
결국 그 임원분은
식당까지 찾아와서 내 사원증을 빌려 갔다.
임원이라도 사원증 없이는
회사 출입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신입사원 시절,
나의 출근 준비는 신성했다.
광을 낸 구두,
잘 다려진 와이셔츠,
그리고 회사 배지.
회사 배지는 나에게 있어 자부심이었다.
회사 배지는 나의 모든 것이자 자랑이었다.
마흔 살이 되었다.
자율복장인 이 회사에 회사 배지는 없지만,
사원증은 있다.
사원증 없이는 사무실 출입도 할 수 없는 현실.
사원증 없이는 화장실도 다녀올 수 없다.
사원증은 나보다 나를 더 잘 대변하고 있다.
강아지 목줄이 강아지의 행동을 제약하듯,
사원증이 달린 목줄은 나를 회사에 묶어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구속하는 사원증이 아니길 바란다.
사원증으로 내가 대변되지 않기를 바란다.
마흔 살의 나는 사원증이 아닌,
내 본연의 모습으로 평가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