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림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사위가 어스름해서 동이 트는 것인지 해가 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들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어둠이었다.
타는 갈증을 물 한잔에 해갈하고 창밖을 바라봤을 땐 어둠 속에 회색의 엷은 구름이 떠있었고 그 끝은 기이하게 붉었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붉은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
머릿속은 매우 깨끗하고 마음이 정갈했다.
샤워를 안 하면 못 견디는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는 동안 일행들이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둘째는 눈을 뜨자마자 부엌으로 향했고 전날 남은 카레와 빵으로 훌륭한 한 끼를 준비했다.
엄마의 마음으로 여행을 하고 있는 듯했다.
창밖에 어둠을 순식간에 걷어내며 동이 트기 시작했을 때는 8시 무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갈 채비를 마쳤을 땐 어느 장애물도 시야를 가로막지 않아 대지의 끝과 하늘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는 지평선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해가 솟아올랐다.
오후 4시면 일정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의 하루 여행을 위해 오두막을 나섰다.
아이슬란드는 기존에 보지 못한 지형이다.
그 자체로 외계 행성과 같다.
그린란드의 남동쪽, 대서양에 위치해있을 뿐인데도 그렇다.
주변에 낮고 높은 구릉들은 대게 화산이 폭발한 분화구였고, 바위로 이뤄졌거나 화산재를 뒤집어쓴 탓에 벌거숭이로 검었다.
곳곳에 분포한 간헐천과 온천에서 새하얀 연기가 솟아오른다.
대지 곳곳에 연둣빛은 이끼류의 식물로 인한 것이다.
이 이끼는 산과 계곡에서 볼 수 있는 짙고 선명한 초록색과 달리 파스텔 톤으로 멜론색, 옥색, 에메랄드색, 정글 색에 가까웠다.
흰색의 이끼들도 다량 분포해있는데 아마도 눈이나 서리가 언 탓이거나 솜털을 둘렀기 때문으로 추정됐다.
흰색에 가까운 회색 하늘과 여기저기 눈 덮인 산과 언덕, 좌우로 넓은 평야와 그 위를 뒤덮은 이끼 이 모든 것의 채도가 낮기 때문인지 유독 아스팔트 도로가 짙고 선명했다.
운전을 하는 동안 누구든 차를 멈추고 싶다면 말하기로 했다.
하루에 3개 정도의 명소를 계획에 뒀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아름다운 아이슬란드는 이동하는 모든 경로가 사실상 명소에 가까워서 목적지 중심으로 여행하기엔 아쉽고, 목적지 중심으로 여행한다면 목적지가 좌절되거나 실망스러운 경우엔 여행이 허무해지기 십상이다.
시야에 담기지 않는 설산을 눈앞에 두고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2차선 도로에서 풍경을 보고 걷고 앉았고, Thingvellir 국립공원에서 Hraunfossar로 이동하던 중엔 명명되지 않은 기이한 장소에 멈춰 섰다.
차를 타고 분화구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도로에는 우리밖에 없었고 화산재의 비탈과 이끼, 원형의 얼음 호수 옆에서 우주복을 입지 않은 우주인의 심경으로 헤매었다.
두 형이 준비해온 드론을 날리는 동안 호수 쪽으로 다가가서 땅을 만지고 비탈길을 뛰어 올라갔다.
무중력 상태가 되어 떠 다닐 수 있을 것처럼 발을 굴렀으나 몸은 한없이 중력에 나약했다.
드론이 보급화된 것은 몇 해 전의 일이지만 여전히 가진 사람은 적고 내 눈엔 신기해서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 낯선 행성에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여행을 마친 뒤 맏형은 이 이름 모를 장소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고 드론의 설정이 이때 잘못돼있어서 사진이나 영상을 못 남긴 것이 아쉽다고 했다.
러스킨의 말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본 것을 연필로 그리지 않고 언어로 그릴 수도 있다.
알랭 드 보통과 러스킨은 이것을 '말 그림'이라고 칭했다.
눈으로 더듬어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름답다'는 단발의 감정이 품고 있는 모호함을 보다 풍부하고 명확하게 한다.
연필의 선이 그리는 객관성이 작가의 주관성에 좌우되듯, 언어로 그리는 풍경도 필자의 주관성에 의해 좌우되는데 내 생각에 언어는 그 정도가 더 크다.
어쨌거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선이 필요하고 더불어 표현을 위한 충분한 질문이 필요하다.
내 경우엔 충분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도 언어적 능력의 한계에 갇혔다.
Hraunfossar에 도착할 무렵 차 문을 열기 힘들 정도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서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바람을 따라 미끄러졌다.
바람이 잔잔해질 때까지 차에서 준비한 전투식량을 먹기로 했다.
전투식량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발열 도시락으로 내부의 봉인을 제거하고 기다리면 물과 발열팩이 섞이며 스스로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이동 중 식당은 물론이고 마트도 찾기 힘든 아이슬란드 여행 중에 훌륭한 식사 수단인데 이런 식량을 한국에서부터 무거운 짐을 가져온 형들 덕분에 먹는다.
경험의 즐거움을 만끽한 뒤 숙소로 이동 중에 날씨는 점점 혹독해졌고 급기야 눈이 내리고 이른 밤이 찾아왔다.
내비게이션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길은 앞쪽 오르막으로 향하는데 그 길목에 기상 악화로 진입할 수 없다는 바리케이드가 서 있었다.
이전까지 눈 때문에 길을 가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고 목적지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가보기로 했다.
가로등도 없는 길에 크고 새하얀 눈발만이 차 헤드라이트에 나풀거렸다.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와이퍼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함 속에 모두 숨죽이고 앞을 바라봤다.
소복이 쌓인 눈길은 경사가 심해질수록 두터워졌고 급기야 한번 바퀴가 헛도는 느낌이 났다.
그때, 운전대를 잡고 있던 둘째는 얼어붙었다.
고개를 돌린 그의 표정은 경직돼있었고 공포가 드리워져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도로를 살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어둠에 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에 쌓인 눈의 두께는 실시간으로 두터워지고 있었고 사방은 고요했다.
어려움 없이 올라온 길도 어느새 두터운 눈이 쌓이고 있었다.
"어떻게 하냐, 어디로 가냐"는 말을 연거푸 반복하는 둘째에게 일단 차를 돌려서 이전의 사거리 갈림길로 되돌아가자고 했고, 막내에게 근처 숙소를 다시 찾아보자고 했다.
막내는 기존에 예약한 숙소를 취소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면서 한편으로 저렴한 가격대의 숙소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이미 어둠이 내린 아이슬란드에서 그것은 쉽지 않았다.
나 역시 각종 숙박 앱을 빠르게 탐색했으나 숙소 자체가 근처에 몇 없었고 모두 전날 숙박비의 2배를 상회했다.
조금 먼 곳에 저렴한 숙소가 있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이 괜찮은지 확신할 수 없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둘째가 그곳까지 갈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막내는 저렴한 숙소로 가고 싶어 하고, 둘째는 두려움에 질려서 어디든 어서 결정하고 싶어 하고, 맏형은 침묵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모두 예민해진 심경을 다독이는 게 가장 우선이라고 판단하여, 가장 가까운 곳에 즉시 예약 가능한 숙소를 에어비앤비를 통해 결정했다.
비싼 가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결정한 숙소로 가는 중에 '멀리 되돌아가더라도 싼 곳으로 가는 게 낫지 않냐'는 말이 나와서 잠시 왈가왈부가 있었으나 숙소에 도착하니 모든 긴장의 끈이 풀리며 녹아버렸다.
숙소는 가격에 합당하게 매우 좋았다.
전날 머문 곳이 캠핑하는 여행자들의 작은 오두막이었다면 이곳은 가족 펜션과 같은 구조로 넓은 주방과 거실이 있었다.
긴장이 풀려 소란스러운 입담이 오가는 동안 맏형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고 서로 씨익 웃어 보였다.
누군가의 감정 사이에 서있는 것은 내 안에도 감정의 잔재를 남기기 때문에 이런 다독임을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전날에 이어 두 번째 저녁 또한 카레였다.
양파를 갈변하도록 달달 볶아서 하는 방식의 카레가 있는가 하면 양파 자체를 향만 내듯 가볍게 볶아서 하는 카레도 있다.
나로선 어느 쪽이든 좋다.
양파를 갈변하도록 달달 볶는 것을 카라멜라이징이라고 하고 둘째와 막내는 이렇게 양파를 볶은 뒤 만드는 카레를 좋아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시작하면 풍미가 짙고 진하고 깊다.
이런 방식의 카레를 무엇이라고 명명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막내는 일본식이라고 했고, 둘째는 백종원 선생님이 이렇게 카레를 만든다고 했으며, 우리가 넣는 분말은 결국 오뚜기 카레 분말이었기 때문에 내 입에는 어떻게 만들든 한국식 카레였다.
달달 볶은 양파와 감자, 돼지고기를 넣고 후추를 잔뜩 뿌려 만든 카레는 간이 딱 맞아 좋았고, 사실 그런 맛과 상관없이 밥이 넘어가고 술이 넘어갔다.
여행지에서의 끼니는 늘 특별하고 아이슬란드의 기묘한 자연과 공포를 경험한 것으로 감정은 고양돼있다.
경직된 몸과 마음을 풀기 위해 더 말을 많이 하고 음악을 크게 틀었으며 난방으로 집을 뜨겁게 데웠다.
아이슬란드의 물가는 여행한 전체 나라 중에서 가장 비싸다.
환경과 산업, 높은 인건비 등 이유야 여러 가지다.
이십 대 초반의 막내와 삼십 대 직장인 형들의 가진 바 자금이 다르고, 세계여행을 언제까지 지속할지 기약 없는 내 여유 자금이 다르다.
우리는 아이슬란드에 도착하기 전에 절약할 수 있는 것은 절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두 형이 동생들에게 양보했다.
아무래도 가진 바 재력이 넉넉하다면 숙소나 식사 등 고생하지 않을 것들이다.
심지어 저렴한 것을 찾고 준비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까지 투자해야 하니 이해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물이 비싼 북유럽에서는 맥주가 물보다 저렴했으나 아이슬란드는 맥주마저 비싸서 입국 당시 면세점에서 분담하여 다량의 술을 사 왔고, 둘째의 주도로 한국에서 출발한 두 명은 전투 식량과 라면, 카레분말, 쌀을 가장 큰 캐리어를 이용해서 가져왔다.
여행의 방법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시기마다 목적마다 너무도 다양하지만 우리가 하는 여행에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렇게 여행하는 게 좋았다.
재정적인 사정 탓에 막내와 더불어 나 역시 절약하는 쪽이었고 그런 탓에 비싼 숙소를 택한 것이 맏형에게 몹시 뜻밖이었다고 했다.
모두의 감정을 빠르게 다독이고 불확실한 도로 상황에 모험하지 않기 위한 결정이었다는 내 말에 형은 한번 더 내 어깨를 다독였다.
한국을 떠난 이후 줄곧 혼자 세계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여행 방법을 시도해왔고 늘 외로움과 동행했기 때문에 누군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며 여행한다는 것 자체에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유독 거세고 찬 바람을 맞은 몸과 위기 상황으로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뜨겁게 난방을 올리고 잠든 다음날 모두 땡땡 부은 얼굴로 일어나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의 두려움을 뒤로하고 오늘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
아침을 먹으며 맏형은 오로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이슬란드에 오고 싶었던 이유가 그것이라며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다.
오로라는 특정 상황에 발생하는 신비로운 현상이어서 여행 기간 동안에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했고, 겨울에 오로라를 관측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겨울 아이슬란드에 왔다고 했다.
오로라를 관측할 수 있는 예보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해서 시시각각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말에 놀라던 찰나 옆에 있던 다른 일행들도 각자 앱과 사이트를 보고 있다는 말을 했다.
오로라 지수라는 것이 있어서 해당 지역에 지수가 높고 날이 흐리지 않다면 볼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다고 했다.
나는 아이슬란드에 오면 오로라를 무조건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정보를 알지 못했다.
오로라가 뜬다면 우리가 그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장소에 있기를 바라게 됐다.
말이 나온 김에 각자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바라는 것을 물었다.
4일은 짧은 시간이지만 매일 24시간을 붙어 다니며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되고, 긴 밤마다 각자의 가면을 내려놓으며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의사를 묻기 적절한 시기였다.
또렷하게 바라는 점은 없다는 말로 운을 뗀 둘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가고 싶은 곳들은 기존 계획에 반영되어 있고 이왕이면 오로라를 꼭 보고 싶다고 했고, 막내는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다만 막내의 재정은 큰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비용 안에 경험을 희망하는 듯했다.
겨울에 할 수 있는 것들 중 동굴 투어, 고래 투어, 온천, 빙하투어, 트레킹 등 기존에 파악해둔 프로그램 정보들과 기상에 따라 변하는 정보를 일행들에게 알려주며 체험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보자고 했다.
우리는 달비크(Dalvík)로 가서 고래 투어를 하기로 했다.
숙소가 있는 아르나르스타피(Arnarstapi) 마을을 떠나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아침 산책길 풍경은 뜻하지 않게 장엄했다.
구멍 뚫린 바위 가트클레튀르(Gatklettur) 사이로 하얗게 부서진 파도가 쉴 틈 없이 오고 갔고, 하늘 위로 구멍이 뚫린 기이한 동굴 사이로 밀려온 바닷물이 주상절리에 부딪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동굴을 내려다보려던 둘째는 눈앞에서 솟구친 물줄기에 놀라 뒤로 넘어졌다.
멀리서 고요한 바다는 가까이서 이리도 분주하고 거칠다.
화산지대의 검은 해변과 기암에 부서지는 거친 파도가 먹구름 가득한 하늘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함께 어우러져 인상적인 해안 풍경이었다.
제주도와 닮았다는 생각에 내 안의 기억과 대조하며 풍경을 천천히 더듬는 동안 일행들은 제각각 흩어져서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많은 여행자들이 여행 중 만난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도 그렇다.
이제는 핸드폰으로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어 과거보다 그 행위는 보편적이고 간편해졌다.
과거처럼 뛰어난 화공을 데리고 다니지 않고, 크고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손쉽게 사진으로 찰나를 붙잡는다.
드론을 위로 날려 땅에 붙은 시야를 달리 조명할 수 있고, 영상을 찍어서 연속된 순간을 소리와 함께 남길 수 있다.
기술의 발전만큼 렌즈 너머의 세상은 실제와 근접하게 담겼다.
아름다움을 소유할 수 있는 이 훌륭한 수단들은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을 앗아갔고, 천천히 오래 간직하기 위한 노력과 마음도 뺐어갔다.
쉽게 촬영한 자료는 디스크에 쌓여 방대해졌고, 붙잡았다 여겨진 자료는 쉽게 스쳐 지나가고 잊혔다.
그런 자료가 불행히도 소실되면 눈으로 더듬고 마음에 남은 정도만을 희미하게 붙잡을 수 있다.
소유했다고 여기며 나중에 다시 볼 생각으로 그때를 자세히 살펴 마음에 담지 않은 탓이다.
그림을 그리는 시선으로 더듬은 아름다움은 장소를 떠난 뒤에도 마음에 선명하다.
산책길에 만난 장엄한 자연에 도취되어 어제의 공포를 잠시 잊은 채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깊은 곳으로 향했다.
아이슬란드 관광청에서 말하길 스나이펠스네스는 눈 덮인 산의 반도라는 뜻으로, 만년설을 머리 위에 쓰고 있는 화산이 긴 반도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얻은 이름이라고 했다.
아이슬란드 육지에서 돌출되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반도는 멋진 해안 도로와 국립공원, 빙하지역, 화산지대 등 다양한 볼거리가 모여있기 때문에 아이슬란드의 축소판이라고 불리고,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아이슬란드를 몸으로 겪고 싶었던 우리가 다양한 체험을 기대한 곳이기도 했다.
스나이펠스네스 반도는 우리에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나이펠스요쿨 국립공원으로 가는 중에 얼어붙은 길이 나왔고, 우리는 어제의 두려움이 떠올라 군말 없이 차를 돌렸다.
뒤늦게 인터넷으로 도로 상황을 살펴보니 전날 기상 악화로 도로 곳곳이 통제됐고, 오전까지도 눈과 비 소식이 있었다.
전날 경험을 통해 심리가 위축됐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고 이 지역을 건너뛰자고 입을 모았다.
결정에 이견은 없었다.
링로드를 한 바퀴 돌아온 뒤 하루 정도 일정이 된다면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국립공원을 가지 않으면서 생긴 여유로 아이슬란드 서쪽에서 북쪽까지 길게 이동할 수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안했고, 위쪽은 날이 개어 평화로웠다.
다시 1번 국도에 합류하면서 아이슬란드의 풍경 또한 완만한 경사와 부드럽게 흔들리는 갈대밭의 향연으로 온화했다.
이 길을 달리는 동안 우리는 마음에 경직된 것이 완전히 풀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팝송을 크게 틀어놓고 저마다 창문을 내려 아이슬란드의 공기와 풍경을 만끽했다.
차 안에선 핫도그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아침에 전자레인지에 데워둔 소시지를 핫도그 번 사이에 끼우고 케첩과 머스터드를 취향만큼 뿌려서 먹는데 탱글탱글한 소시지의 식감과 소스의 조합이 예술이다.
특히 토마토케첩의 맛이 진하고 균형이 뛰어나서 눈이 크게 뜨일 만큼 맛있었다.
핫도그를 준비하기로 한 서로를 칭찬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각 재료의 값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준비가 간편하고 이동 중에 쉽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간식을 대량으로 소비하게 될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드론 하나를 잃어버렸다.
피오르드 옆 황금빛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길에 자동차 CF처럼 영상을 찍어보겠다며 드론을 날린 후 목표물을 따라오는 기능을 설정했는데 그대로 마지막 순간이 됐다.
차가 얼마 이동하지 않았기에 다시 뒤로 돌아간 뒤, 조정 거리를 이탈한 드론이 그 어딘가에 불시착했으리라 생각하여 들판과 길 위 여기저기를 살펴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들판에서 이삭 줍는 농부들처럼 저마다 허리를 숙인 채 드론을 찾는 동안 해가 서서히 뉘어가며 황금빛 햇살을 황금빛 들판에 드리웠다.
그 드론이 여전히 하늘에 떠있는지 어딘가 불시착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슬란드 여행을 위해 구입한 드론을 잃어버린 둘째의 마음을 헤아리니 안타까웠고, 이런 순간이 우리에게 벌어져서 또 하나의 추억거리 아닌 추억거리가 생긴 것에 난처한 헛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찾기를 포기하고 차에 타서 이동하는 동안 서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하루에 하나씩 사건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드론을 생각한다.
드론은 어디까지 날아가서 떨어졌을까.
동력을 잃을 때까지 자유롭게 날아다녔을지도 모를 드론이 누군가에겐 UFO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가지 못한 빙하의 정상 어딘가에 떨어졌을까.
계속 위로 상승해서 인공위성처럼 떠도는 건 아닐까.
자신의 신호를 잡아줄 주인을 기다리면서.
달비크의 고래 투어를 예약해뒀기에 근처 도시 아쿠레이리에 숙소를 잡았다.
카레를 만들기 위해 구입한 돼지고기를 팬에 굽고 밥까지 볶아서 근사한 식사를 하는 동안 왠지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로라 지수를 나타내는 앱에서 그런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기에 한 명씩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오로라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