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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Dec 13. 2024

참 스승의 의미

<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 / 김난도


◉ 저는 1963년 3월 2일에 태어났습니다.
3월 2일이요. 그렇습니다.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어릴 때는 제 생일이 싫었습니다. 학년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라 제대로 생일잔치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늘이 제일 좋습니다.

1년 365일 중에 아무 날이나 생일로 고를 수 있다면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오늘 3월 2일을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일 아침에 전국의 학생들이 모여 일제히 새 학년을 시작한다는데, 선생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생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사주팔자 같은 것은 믿지 않지만 그래도 생일만큼은 선생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직업을 천직이라고 여길 수 있으니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 김난도 <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 중




사직서를 제출하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뭘까?'를 고민했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문학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국어 선생님.

방통대로 편입해 국문학을 전공하고, 교육대학원을 준비하며 꾸준히 글도 쓰고 학점관리도 열심히 했지만 '암'은 불청객처럼 자주 나를 찾아왔다. 전업 치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선생님에 대한 꿈과 조직 생활에 대한 미련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김난도 교수의 이 글은 국어 선생님을 꿈꾸며 공부하던 시절 필사 노트에 적어둔 글이다. 친구들이 회사에서 자리를 잡으며 사회인으로서 안정된 삶을 꾸려나갈 때, 나는 잘 다니던 곳에서 퇴사했으니 혼자만 뒤쳐진 것 같았다.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전공에 대한 선행 과목이 필요해 다시 학사 편입부터 시작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레포트, 각종 과제를 해내며 '그냥 회사 다닐걸 그랬나. 괜히 나왔나' 하는 마음들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이 노트를 펼쳐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몸이 아파서 힘들었던 기억,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긴 공부, 학사 편입과 대학원 과정... 그 모든 터널을 지나 아이들 앞에 선 내 모습이 그려졌다.

이 글 속의 김난도 교수처럼 내 생일도 3월 첫째 주이다. 언젠가 선생님이 되어 교단에 선 내 모습을 수도 없이 상상하며 나는 길고 어려운 시간들을 견뎠다.


비록 원하던 선생님은 못 되었지만 가끔 필사 노트를 들추다 맨 앞장을 차지하고 있는 이 글을 볼 때면 '이런 꿈을 꾸며 열심히 살았던 적이 있었지' 하는 생각에 애틋한 마음이 든다.



스티커도 붙여 놓은 애정하는 글



내가 '선생님'의 꿈을 가지게 된 데에는 나에게 있는 사랑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지만 학창 시절 만난 좋은 은사님들의 영향이 크다.


K교수님은 전공과목을 수강하며 만나게 된 분이다. 푸근한 인상에 곰돌이 같은 교수님이셨는데 종강하는 날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한 학기 동안 제 과목을 수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만일 여러분들처럼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간다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들이 다 무너진다 해도 몇 번이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실패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삶의 모든 것이 리셋돼도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좋은 나이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수업을 하면서 저의 의도와는 다르게 여러분께 상처를 준 부분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립니다.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교수님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우리들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건네셨다. 말과 글에는 그 사람의 인품이 묻어난다고 생각한다.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지만 한 학기의 끝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인생을 살아본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당부와 사과를 건네는 교수님의 모습에 나는 참 좋은 선생(先生)을 만난 것 같아 마음이 훈훈해졌다.

본의 아니게, 실수로라도 학생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신 분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교수님은 아직도 모교에서 강의를 하고 계셨다. 그때 그 마음 그대로 후배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삶의 지혜를 계속 전해주셨으면 좋겠다.




B교수님은 부전공 수업에서 만난 분이었다. 너무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라 그녀가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리고 출석을 부를 때에도 숨을 죽여야만 했다. 딱딱하고 날이 선 말투, 일말의 농담이나 사담은 전혀 없는 강의, 대리 출석이나 수업 태도 불량 등으로 지적당하는 날에는 어마어마한 불호령이 떨어졌다. 작고 아담한 체구에 어디서 그런 불같은 성미가 나오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수업을 듣던 학생들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교수님께서 조금 더 엄격하게 하신  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조금 말랑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너희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나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삶을 살 거야. 그래도 꽤 괜찮은 기업에서 일하게 될 거고 연봉도 어느 정도 이상은 받겠지. 그러면 너희가 받는 월급의 일부, 단 2만 원 3만 원이라도 꼭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이나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를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누리는 당연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너희가 살면서 그런 부분들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수업 내용과 관련 없는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 분이셨기 때문에 교수님의 이 이야기는 기억 속에 더 강렬하게 남았다. 차갑고 냉정한 분이라는 편견 때문에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의외라고 느껴졌지만, 사회인이 되면 꼭 그러겠노라 혼자 조용히 다짐했었다.

그리고 입사 후 첫 월급을 받으며 소아암 환아들과 호스피스 시설로의 후원을 시작했다. 관심을 갖고 보니 도움이 필요한 곳들은 너무나도 많아 선택이 미안할 정도였다.


당시 내가 일했던 곳 역시 대학교였기 때문에 졸업 후에도 '스승의 날'의 분위기는 매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스승의 날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B교수님 생각이 났다. 강의 계획서에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어 조금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서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2008년에 일본어 강독 수업을 들은 윤이나입니다. 지금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여 회사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대로 작은 돈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교수님께 고맙다는 답장이 왔다.




사실 나는 '교수님'이라는 말 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더 마음이 간다. '선생(先生)'이라는 말에는 '인생을 먼저 산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있어 학문적인 가르침을 주는 사람을 넘어서는 더 큰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았.

지식을 잘 가르치는 사람은 많다. 굳이 학교가 아니더라도 인터넷, TV, 서적 등으로도 학습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을 사는 지혜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졸업한 지 십수 년이 흘르고 사실 전공과 관련된 국제법과 국제 경제학, 통상정책론 등은 애석하게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실패와 좌절이 와도 우리는 아직 젊기 때문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며,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도 온정의 손길을 내밀 줄 알아야 한다는 스승님들의 가르침은 여전히 내 마음속 한 편에 등불처럼 남아있다. 


교권이 무너져도 시간이 더 흘러 대학이 사라진다고 해도 학생들을 올바를 길로 이끌어 줄 선생님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은 절대 AI나 로봇으로 대체될 수 없다.

지식을 전달해 주고,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 부모가 해야 할 부분과는 또 다른 메시지를 우리 마음에 심어줄 수 있는 사람. 인생을 살면서 그런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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