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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화학요법(AC) 2차, 비현실적인 욕망의 발현

4. 유방암 수술 후 항암화학요법 치료기

by Psyber Koo

도망가고 싶다.

처음 맛본 빨간 맛에 치가 떨려서인지 불가능하고 실행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욕망의 불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예약된 2차 날짜의 일주일 전 알림 문자가 왔을 때는 내 상태가 그리 온전치 못해 욕망이 다 무엇인가? 산책이라도 집 앞 슈퍼라도 다녀오고 싶다는 소소한 소망도 반열에 들어서지 못하는 수준이었기에 알림 문자에도 동요 없이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삼일 앞으로 다가오자 컨디션도 회복되었겠다 오만가지 시뮬레이션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힘들었던 그 여정이 또 시작된다고? 까무러치기를 또 반복해야 한다고??

하아. 도망가고 싶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휴가 후 복귀날 전에 드는 그 맘인가 보네.”

육군병장 만기제대한 지 이제 6개월 남짓된 아들이 내 혼잣말을 듣고 한마디 한다.

“그렇게 현실적인 분이 허허. “


나는 엄마이자 아이가 되어있었다. 이렇게 나는 매일 새로운 바닥을 맛보고 있다. 또다시 펼쳐질 매운맛이 가져다줄 내 바닥이 조금 두렵다.




빽빽했을 때 자의로 스타일링(?)한 민머리는 그래도 봐줄만했는데 3주 차가 되자 후두둑 빠지기 시작했다. 고양이털 전용 돌돌이는 이제 내꺼가 되었다. 모여있는 1cm도 채 안될 까만 샤프심 같은 털은 징그럽기도 하고 모래사장에 선을 그어 그림을 그리듯 뭔가 그려도 될 것 같아 재밌기도 하다. 미리준비해 둔 수면용 비니는 낮밤 가리지 않고 써야 이 오묘한 샤프심그림판 반경을 줄일 수 있다.

듬성듬성 빠져서인지 흉흉해진 빈집을 보는 것 같다. 여러 통증으로 힘들었던 신체 컨디션은 한결 돌아온 것 같은데 마음은 어느 때보다 무겁다. 실제 두피도 들뜨고 무거워서 두피케어제품을 주문해 열심히 관리해 본다. 이참에 두피관리하는 거지 뭐!




요양병원 퇴원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세운 소소한 목표는 나를 돌보는 것이었다. 어미가 아기를 돌보듯 부드럽고 세심하게 필요한 부분을 살펴 제공하려 노력했다. 육아경력직이니 그다지 어려울 것 없다 여겼다. 그때는 일과 육아를 병행했으나 이번에는 일을 손에 놓았으니 역할에 더 충실할 수 있겠지?

매 끼니 나를 위한 식당을 운영(?)하며 영양을 체크하고 기분을 살리기 위해 예쁘게 담아내어 생기를 넣으려 했다.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아 따뜻한 레몬차에 라즈니쉬의 명상책을 읽고 스트레칭을 하며 루틴을 만들었고 피로감이 들면 하던 일을 멈추어 쉬게 했고, 하루의 마감은 건강상태를 체크해서 기록하며 다음날을 준비했다.


하지만 삼일 전부터는 이런 극진한 돌봄 루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합니다.’

라고 부모상담 시 내담자에게 했던 말을 나에게 한다.

그리고 나를 위한 식당운영(?)을 잠시 쉬기로 했다.

저녁으로 해산물이 먹고 싶어 중식을 시켰고, 다음날은 부작용으로 나타났던 구내염으로 주사치료 후 당분간 입에 못 댈 매콤함을 채우기 위해 닭갈비를 시켰다.

한 열흘 간 내 엄마가 되어 아이인 나를 자연건강식으로 살뜰히 채웠는데 이렇게 또 제로섬이 되는구나.




* 2차 항암화학요법 치료일: 25년 2월 6일(1차항암 + 3주차)


2차부터는 항암당일 외래진료 전 피검사를 해야한다.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는 몸인지 확인하는 절차이다.

암병원 채혈실은 8시부터 운영이 되는데 워낙 대기가 길다고 들은 바 있어 미리 준비해 7시 40분경 도착했다.

대기표 14번.

소문난 맛집 줄 서기에 대해 그다지 욕구가 없는 나에게 아침잠을 줄여가며 출근 전 오픈런으로 천연발효종 빵을 대주고 있는 동생이 내게 한 말이 있다. 오픈 시간에 맞춰 가는 게 오픈런이 아니라고. 맞춰가면 내 앞에서 끊길 수 있으니 적어도 1시간 못해도 30분 전에는 가는 걸 오픈런이라 한다고.

조언에 힘입어!

암병원 채혈실 오픈런에 성공했다.


피검사결과 좋고(돌봄성공?!), 1차 항암 후 증상에 따른 주차별 표정리를 가져가서 진료시간도 단축했고 약 받아서 빠르게 암병원 통합주사실로 총총총.

베드가 어느 정도 차 있었지만 다행히 바로 가능해서 12시 전에 끝났다. 내가 들어가고 30분쯤 지나자 대기가 되었으니 이 루틴으로 3차도 오전종료하자!


주사약이 들아가자마자 나타나는 증상들은 1차와 유사했다. 어쩔 수 없는 것에 연연치 말자.

약냄새가 역하네.

어지럽군.

주사 맞으며 읽으려 했던 책은 몇 줄 읽지 못한 채 그대로 덮었다.

점심을 먹으며 동행해 준 짝궁에게 1차 때는 옹졸하게도 못 건넸던 고마움을 표현하는 용기와 여유도 부렸다.




도망가고 싶은 욕구를 누르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마음담뿍 담은 내 사람들의 응원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심리적으로 가까운 이의 아픔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각자 자신만의 짐이 있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응원을 건넨다. 사정에 맞게 각자의 방식으로 응원을 한다.


글이든 말이든 음식이든 만남이든 금융이든… 수단은 다양하다.

방법 또한 다채롭다.

적극적으로 혹은 조심스럽게 아님 유머러스하게 또는 무심하게.

개인마다 배합된 정도가 달라 더욱 개성이 뚜렷해진 유일무이한 모습이 된다.


2차 일정 전날 때마침 도착한 응원선물은 더욱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는데 마음 한켠을 고물고물하게 만드는 손 편지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고른 책, 손으로 짠 듯한 시원한 듯 온기를 잡아주는 쁘띠목도리.

책으로 만난 인연은 언제나 이렇게 아리땁다.


응원은 응원하는 사람을 닮아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나를 배려해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진짜 온 우주가 티끌도 안 되는 존재인 나의 치료성공을 기원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제대로 받고 인사도 못하는 현재 실정에 미안함이 들기도 한다.


단, 민머리를 유머로만 대응할 때, 내 아픔을 일반화시키는 무심함은 마음 한켠이 조금 아리고 서운함이 들지만 그도 방법을 몰라 찾다 찾은 대응이었다 생각하니 아렷던 마음이 가라앉고 이해가 된다. 그 말을 고를 수밖에 없었을 그가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아주 약간은 귀엽기까지 하다.


그래도 이 말만은 제발 넣어두었면 한다.

“유방암은 착한 암이라더라. 나 아는 사람 치료받고 거뜬해졌대. 괜찮아질 거야. 힘내.”

유방암에 은근히 ‘착한 암’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표준치료의 의미에서 환자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치료진이 붙인 꾸밈말인 듯한데, 모두가 쓰고 있어 아이러니하다. 독감도 안 착한데 중증 암이 착할 리 없잖아?

뭐 그래. 암분류체계에서 유방암은 어떤 의미로는 착한 면이 있을지 몰라도 그 치료여정은 전혀. 전혀. 노노! 네버!

도망가고픈 욕망 품기를 수십 번 했을 것이나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 않고 치료를 무사히 끝낸 그들의 인내와 용기에 박수를 치고, 치료과정 중인 우리도 역시! 나 또한 그렇게 해내리라 욕망해 본다.


가까운 사람이 암밍아웃시,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하던데 그런 맘 들면 나한테 욕구분출 해. 너의 긴 치료여정에 내가 쉼터나 힘이 되어 줄 수 있으면 좋겠어.‘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정말 너무 고맙고 든든할 거 같다.


하지만 사실.

그 모든 말이 고맙고 든든했다.

정제되었든 날 것이었든 상관없이.

워딩은 달랐지만, 전해진 진심과 행동은 하나였다. 어떤 모양이든 내게 건넨 이 모든 응원은 답답한 내 맘에숨구멍이 되어 주었고 홀로건너는 듯한 착각에 빠진 터널 속 촛불이 되어주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2차 항암을 위해 진료대기중, 세계유방암학술대회 알림포스터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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