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방암 수술 후 항암화학요법 치료기
미용실에 삭발을 예약하긴 처음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동네 1인 미용실에 사람이 없는 시간대로 예약을 했다. 여러 사람들을 대했을 미용실원장님은 사정을 눈치채셨는지 이유는 묻지 않았고 의자에 앉은 내게 얼마나 짧게를 원하는지 물어보셨는데 삭발 길이에 대한 정보가 없어 “다 빠질 거니 그냥 밀어주세요”라고 말했다.
뒤에서부터 시원함이 느껴졌고 차츰 옆으로 옮겨지며 긴 머리가 뭉턱하고 떨어지는 게 내 시야에 들어왔다. 잘려나가는 머리를 내려보며 내가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하자 원장님은 한 손으로는 이발기를 밀고 또 한 손으로는 내 시야를 살짝 가려주셨고, 깊은 숨쉬기 후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6mm로 시작했으나 아무래도 어정쩡한 것 같아 최종 3mm로 마무리를 지었다.
동그랗다.
낯선데 익숙하다.
슬픈데 웃기다.
거울 속에는 10살이 되던 해 여름 부쩍 늘어난 활동량에 비례하는 땀을 주체할 수 없어 까까머리로 다듬었던 그때의 내 아이가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너무 낯설지는 않았다.
이런 거 구나. 삭발이.
2년 전 꼭 이맘때 군입대를 위해 삭발식을 경험했던 삭발선배인 아들이 비니를 준비해 온 덕인지 양옆으로 가족을 끼고 오가서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겨울밤이지만 시리지 않았다.
“머리는 2,3주면 빠집니다. 약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끝나고 3개월 정도 되면 다시 자라나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요.”
치료계획을 이야기하시던 교수님은 부작용 중 가장 심리적 타격을 입는 ‘탈모’ 부작용에 대해 간단하고 명확하게 언급해 주셨다. 구역구토만 걱정했던 건 아니지만 직접적인 워딩은 깊은 숨을 필요케 했다.
내 가장 가까운 미래는 민머리구나.
미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항암화학요법 후 1, 2주 차에는 구역구토등에 대비하며 일상루틴 찾아 복귀할 수 있도록 증상관리 및 회복에 힘쓰고 3주 차에는 민머리에 대해 준비해야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일주일 요양병원생활 후 퇴원하여 집에서 나를 돌보다 보니 내 피로감의 루틴도 알게 되어 활동기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가까이 지내는 동생은 항암치료 시작하며 레몬청과 샐러드에 천연발효종 통밀빵을 매일 같이 대주고 있어 식단을 준비하는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가족과 친구들의 애정, 관심 그리고 응원을 영양제 삼아 먹은 나는 활동시간에는 빠르게 식단을 준비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다 보니 훌쩍하고 빠진 몸무게도 조금씩 돌아왔다.
항암화학요법의 14일 기적- 주사 맞고 14일이 되면 전날까지 아랑곳 않던 머리카락이 뭉터기로 빠진다고 한다-은 변함없을 것이고, 내 경우는 그 시기가 하필 딱 설명절 연휴기간이라 미용실 이용이 어려울 거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자 그렇다면, 뭉턱뭉턱 빠지는 경험을 하며 명절 연휴를 보내다 삭발을 할 것인가?
흠, 그건 좀 비참해지는 것 같다. 너무 환자 느낌 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주어진 투병기간을 수동적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 암은 내가 어쩔 수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싶었다. 나답게.
그래야 스트레스도 덜 받지!
이왕 맞이할 미래라면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맞이하자. 기꺼이!
AC주사 2주 차엔 여전히 일정시간의 활동 후 까무러치듯 휴식이 2시간은 필요했지만 활동의 시간이 50분가량까지도 가능해서 무언갈 도모할(?) 수 있어 살만했다. 예약 시 미용실에서 한가한 시간으로 저녁 6시를 말했고, 나는 이동 시간을 포함하여 5시 40분부터 6시 30분까지 활동할 수 있도록 컨디션을 조절했다.
어쨌든 삭발은 모든 털이 멀쩡할 때 내 의지로 하자.
6개월에 한 번씩 하고 싶은 스타일링을 골라서 미용사에게 요청한 예전의 나 그대로.
가족과 동행한 삭발식 후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 거울 앞에서 이미 도래한 미래의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 스카프를 둘러보았다.
스파이처럼 은밀하게 속삭여본다.
내가 원해서 한 거다!
빠져서 한 거 아니다!
삭발, 암환자. 뭐 대순가?
그래 이왕이면 힙하게 보내자.
나답게.
가발은 구매하지 않았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6월쯤이면 나겠지 뭐.
그동안 누굴 만나는 건 최소화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