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에 나가 발을 구르는 일에는 약하지만, 침대에 가만히 누워 쓸데없는 공상을 하며 머리를 굴리는 일은 내 전문이다. 운동에 입문한 지 석 달 정도 흐른 어느 날, 형사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내게 찾아와서 "지난 30일 밤, 어디서 뭐 하셨습니까?"라며 추궁하면 어쩌지? "방 안에서 혼자 땅끄부부 칼소폭 했는데요..."라며 유튜브 시청기록을 보여줘야 하는 걸까? 어쩌면 나는 헬스장에 가지 않고 목격자 한 명 없이 방 안에 틀어박혀 홈트를 하는 탓에 구체적 알리바이 확보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나의 운동은 이렇게나 극비리에 진행됐다.
질리도록 한 적은 없지만 질렸어요
석 달의 인터벌 사이클 타기를 완수했을 무렵, 내게도 슬슬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상을 틀어둔 채로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페달을 돌리는 일에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딱히질리도록 탄 적은 없는데 그냥 질렸다. 운동은 어쩜 이렇게나 빨리 질리는 걸까. 레몬케이크나 레드와인은 매일 먹어도 안 질릴 것 같은데.
의지박약을 의인화하면 그게 바로 나 아닐까? 이런 나 자신이 어이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쨌거나 운동은 계속해야 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은 아주 한정적이었지만,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운동을 위해 외출하기'라는 절차가 하나 더 생기면 그렇지 않아도 바닥을 기고 있는 의지력이 한층 더 감소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지?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줄넘기가 건강에 좋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초등학생 시절, 내 특기는 줄넘기였다. 일명 쌩쌩이라고 불리는 2중 뛰기부터 엇갈려 뛰기까지 각종 기술을 섭렵한 실력자로서, 남자애들을 모두 재치고 수행평가 1등을 거머쥔 이력이 있었다. 15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줄넘기를 다시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운동해야 하는데, 가만히 있고 싶어요
사실 매일 밖에 나가서 줄을 넘을 자신은 없었다. 모기와 함께하는 운동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거실에서 줄넘기를 꺼내 들었다가는 강아지들의 분노를 살 게 분명했다. 큰 소리 나는 일을 싫어하는 상전들을 모시고 사는 입장에서, 거실 운동이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로, '줄 없는 줄넘기'를 샀다. 방 안에서 혼자 조용히 돌려볼 요량이었다.
줄 없는 줄넘기를 처음 손에 쥔 나는 감탄을 내뱉었다. 이런 신문물이 있다니! 무게추가 달려있어서 선이 없어도 얼추 줄넘기를 돌리는 느낌이 났고, 발에 걸려서 고통받을 일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몇 번을 뛰었는지 알아서 세어주기까지 했다. 비록 팥 없는 팥빵처럼 줄넘기 고유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렸을지 몰라도, 줄넘기의 단점을 모두 상쇄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가 고려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내 체력이 줄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거였다. 하루에 천 번도 넘게 펄쩍펄쩍 뛰어대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100번만 뛰어도 숨이 차서 잠시 쉬어야 했다. 나는 분명 젊은 사람이나, 더 이상 마냥 어린 사람은 아니라는 걸 걸 줄넘기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500개쯤 채우자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포털사이트에 '줄넘기 개수'를 검색하자,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줄줄이 질문을 올리고 있었다. '줄넘기 하루에 몇 개정도 해야 운동효과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건강 인간들의 답변은 대체로 비슷했다. "최소 2,000개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늘려보세요^^. 줄넘기는 금방 하니까, 매일 3,000개 이상 하시는 게 좋죠!"
꾸역꾸역 천 개를 채우고 나니 '사이클은 다리가 터질 것 같긴 해도 앉아있을 수라도 있었지' 같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계속해서 뛰어야 한다는 줄넘기의 특성이 나를 힘들게 했다. 운동을 하겠다면서 가만히 있고 싶다는 건 무슨 심보일까?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가능하다면 서있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소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는 그만 넘고 싶었다.
나의 공짜 트레이너들
집순이에게 최적화된 운동을 하나 꼽자면, 그건 아마도 홈트일 것이다. 가장 은밀하고 조용하게, 집 안에서 혼자 사부작댈 수 있으니까. 헬스장에 가서 PT를 받으면 참 좋겠지만, 너무 비싼 데다가 너무 멀었다. 홈트는 공짜인 데다, 침대 바로 옆에서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침대와의 거리는 내 심리적 안정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며칠에 걸쳐 유튜브를 뒤적거리면서 알아낸 사실은, 부위별로 유명한 영상이 다 다르다는 거였다. 허리는 티파니, 다리는 마일리, 팔은 신지니... 사람들이 공유하는 운동 루틴을 읽으며 운동 유튜버가 이렇게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 알고리즘에는 단 한 번도 운동 같은 게 뜬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재즈 플레이리스트로 가득한 나의 홈 화면에 근육질의 건강 인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운동 유튜브의 세계는 넓고도 심오하여, 나 같은 게으르니스트를 위한 '누워서 하는 운동 모음' 같은 영상들도 있었다. 나는 홈트 입문용으로 가장 무난하다는 땅끄부부의 '칼소폭' 영상을 골랐다. 노트북 화면에 영상을 띄워두고 방 안에서 열심히 몸부림을 쳤다. 침대에 누운 고양이 제제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나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인생도 트루먼쇼처럼 생중계되고 있다면 지금이 하이라이트 아닐까? 누가 보고 있으면 엄청 웃기겠는걸. 시뻘게진 얼굴로 그런 생각을 했다.
5분이 이렇게 길었나
분명 영상의 제목은 초간단 5분 복근운동이었다. "자~ 힘드신 거 알아요~ 조금만 더 버티세요!" 건강하고 건장한 선생님들은 우리 종이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5분이 이렇게 길었나? 나만 이렇게 힘든 건가 싶어 괜히 댓글을 뒤적거려 보았다. '지금까지 인생을 상당히 편하게 살고 있었구나...' 베스트 댓글이 말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에 괜스레 위로를 받았다.
'마일리 사일러스 다리운동'이라는 악명 높은 홈트 영상을 따라 할 때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런 운동을 매일 했다니, 마일리 사일러스 씨는 독종이 분명했다.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으려면 다 이 정도는 하는 걸까?나는 월드투어를 도는 슈퍼스타도 아니고 그냥 경기도 양평 사는 26세 여성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고통받을 필요가 있나? 다음 달에 데뷔할 것도 아닌데. 유튜브 영상 하단의 빨간 선이 어디까지 왔는지, 영상이 몇 분이나 남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다 보면 어느덧 3시간 같은 30분이 흘렀다.
부위별 홈트 영상을 보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여기에도 근육이 있구나?"였다. 내가 이런 깨달음을 전달하자, 운동쟁이 친구가 의아하다는 듯이 답했다. "어디에나 근육이 있지... 네가 안 쓸 뿐." 홈트에 도전한 며칠은 한 번도 그 존재를 인식해 본 적 없는 새로운 근육들의 위치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차라리 사이클로 돌아갈까 싶었다. 정말이지 새로운 근육의 위치 같은 건 그만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