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규칙만 따지고 있을 건가요
간혹 규칙만 따지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되고 같은 말만 늘어놓는다. 이를테면 업무적인 문제가 생겨 어떤 회사에 전화했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이 내 말의 요건만 확인하고 안내하는 식이다. 얼마 전에 휴대폰 개통 문제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약정이 끝난 중고 휴대폰이 멀쩡해서 다른 통신사로 번호이동해 더 쓰려고 했다. 스마트폰에 꼽는 유심칩만 바꾸면 되니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새로 가입한 칩을 연결해도 개통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내 단말기가 분실 보험 처리된 전산 이력이 있어 바로 쓸 수 없었다.
이때부터 속 터지는 이야기가 시작됐다. 처음에 가입했던 통신사에 문의해보니 전산에 어떤 기록도 없어 그냥 쓰시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해지하기 직전까지 잘 썼으니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다시 새로운 통신사에 전화해보니 역시 분실 이력이 있어 도와주기 어렵다고 했다. 어쨌든 처음 가입했던 곳에서 문제를 찾아 해결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시 전화해보니 또 문제없다고 했다. 여기저기 전화를 6차례나 걸며 같은 말을 반복할 정도로 어떤 문제가 있는데 그게 뭔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말한 증상이 없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이 기계처럼 일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전화를 한 궁극적인 이유는 별로 관심이 없고, 내가 말한 부분이 맞는지 틀린지만 따지고 있었다. 그러다 규정상 답변할 수 없는 부분이거나 모르는 부분은 자신의 입장만 얘기했다. 정작 내가 겪고 있는 불편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내 질문에 충분히 대답을 했다는 식으로 전화가 종료됐다. 이런 와중에 문득 옛날에 통화했던 고객이 생각났다. 당시 근무했던 회사의 제품을 구매했는데 하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상품 모서리에 날카로온 부분이 있어 손이 베일 뻔했다는 얘기였다.
더 긴 얘기를 들어보기 전에 고객이 뭔가를 착각했다고 단정했다. 엄격하게 품질 관리된 제품이고 배송 전 확인도 거쳤는데, 그런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고객의 말이 정확한지, 맞는지 틀린지에 대해서만 여러 차례 묻고 확인했다. 생산 담당자가 작성한 서류를 봐도 문제가 없었다. 회사 내부 문제가 아니란 판단이 서니 고객이 뭔가 실수한 부분을 회사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로봇처럼 답변하기 시작했다. 개봉해 사용한 제품을 무조건 환불해달라고 강변하기 시작하자 규정상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다 '내가 지금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입니까'란 고객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실은 그랬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시간과 정력이 남아서 일부로 그렇게 전화하지 않았을 것이란 깨달음이 생겼다. 혹시나 싶어 다시 내부자료를 확인해봤다. 문제없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실수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품 사이에 등급 낮은 것이 섞여 들어갔거나, 오인해 발송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만의 하나, 고객의 말이 맞다면 회사 입장에서 매우 잘못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의심만으로 책임 소재를 가려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었다.
고심 끝에 고객 입장으로 일처리 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단 한 부분이라도 회사 쪽의 잘못이라면 나머지 전체가 문제없어도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배송, 포장 등 제반 비용 일체를 회사가 부담하고 전액 환불해주었다. 제품을 회수해보니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제품 모서리에 날카롭게 패인 자국이 있었다. 재생산된 중고 제품에 생길 수 없는 일인데 고객 탓으로 단정하기도 애매했다. 어쨌든 그분의 문제는 해결했으니... 반면 내가 고객 입장이 돼 보니 따끔한 일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제 문제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건가요!'
단 한 순간이라도
제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도록
뭔가를 깨워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