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hite whale Apr 03. 2020

아빠가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선물

나의 아버지도 이 선물을 받으셨을까

내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즐겁고 신나는 일보다 혼나고 울었던 기억이 더 많이 만져진다. 왜 그렇게 용서를 구하고 우는 일이 많았던지 지금은 세세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PC방에 몰래 가서 게임하다가 혼났고, 만화책이나 무협 소설을 몰래 숨겨 보다가 들통나 혼났고, 사춘기 때 대들다가 혼나는 등 하지 말라고 한 부분을 지키지 않거나 거짓말하고 숨기다가 혼났던 기억이 드문드문 난다. 물론 이런 내용 말고 웃고 떠들며 장난쳤던 순간도 또렷이 있는데도 엄격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그분을 의지하고 존경하지만 거리감이 있었다. 당신과 다른 생각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신 성격은 지금도 어려운 부분이다.


내 아버지를 톺아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이 보인다. 나는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로 추억될까. 바라건대 재미있고 잘 놀아주며 무엇이든 의논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아빠로 기억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일을 시작하고 몇 년간 아이와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내가 다녔던 직장은 기자 때를 제외하면 주말 근무가 없고 칼퇴근을 할 수 있었다. 매월 야근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다만 평균 3시간이 넘는 통근 거리 때문에 물리적인 시간이 줄어들긴 했다. 그래도 일을 마치고 집에 출근하여 내 나름대로 열심히 육아를 챙겼다. 그래서일까. 육아도 일처럼 한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됐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하지 않으면 못 견뎌하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아빠란 직책은 아이를 낳을 때 저절로 주어졌다. 자격증이 있거나 시험을 통과한 것도 아닌데 무심코 시작하게 된 일이다. 물론 보고 들은 바가 있어 책임감을 갖고 아빠 역할에 대해 공부했었다. 인내하며 열심히 현장실습을 하니 효과를 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때 성취감을 느끼며 아이가 크는 만큼 나도 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이것이 내 일방적인 감정임을 알게 됐다. 아이와 교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아이의 무언가로 인해 나를 바꾸거나 영향을 받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아이 보는 시간이 끝나면 더 이상 아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반대로 아이를 볼 때는 일 생각이 마구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아이를 책임질 뿐 동행하지 못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혀 같은 높이로 있어주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세계가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문구처럼 그 알의 세계를 깨고 나오며 새롭게 태어나 자라 갈 것이었다. 나는 그런 과정을 바로 옆에서 같이 해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과 달리 내 시선은 매우 높은 곳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에 아이가 쑥 자리 잡았다. 아이의 얼굴을 천천히 보게 되고, 눈빛과 입술 모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팀장 일에 애정이 붙기 시작한 즈음이었던 것 같다. 팀원이 아니라 식구 같은 생각이 들고 팀의 크고 작은 일이 남 일이 아닌 내 일처럼 느껴질 무렵, 아이도 달리 보였다.


아빠도 팀장도, 모두 인생에 찾아온 사건이었다. 실은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기회였다. 맨날 누군가에게 받기만 하던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인생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이란 것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것이 남들이 부르는 이름과 매일 해야 할 일로 포장돼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거나 얻을 수 없는 '추억'이 선물로 들어 있었다. 나는 이런 기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돈을 지불한 적이 없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했고 걸어야 할 길을 걸었을 뿐인데 나만의 특별한 기억이 주어졌다. 그래서 사는 게 즐겁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가 싶다. 내 아버지도 이 선물을 받으셨을까.    


저는 오랫동안 어떤 세계를 깨지 못하는 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되어 비로소 그것을 깰 수 있었습니다. 
이전 11화 아이를 키우는 건지 내가 크는 건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