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로서 내 점수를 매긴다면
아주, 가끔, 아이를 돌보다 불같이 화날 때가 있다. 얼마나 마음이 말랐으면 작은 불꽃이 떨어지자마자 삽시간에 타오른다. 내 마음의 단골 방화범은 둘째 아이다. 잘 때는 곱디고운 아들 녀석이 종종 말이 안 통한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다해달라고 떼쓰거나, 코를 파서 먹고, 때로 더러운 것을 입에 넣는다. 간혹 아이가 화를 못 참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때리면 더는 못 견디고 내가 나선다. 좋게 타이르면 장난으로 여기고, 엄한 표정을 지으면 알겠다고 하고는 곧 같은 행동을 다시 한다. 분통 터진 나는 결국 큰 목소리로 호되게 질책하고 만다.
아이의 행동이 그 마음과 상태를 대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안이 생길 때마다 옳은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하지 않을 행동을 잘 타이르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익숙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내게 했던 훈육의 흔적이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행동한 뒤에 아빠가 개입할 경우 표정부터 살핀다. 얼굴이 괜찮으면 별일 아닌 것처럼 지나가지만, 무서우면 이내 꼬리를 내리고 잘못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눈치를 보는 것이다. 이는 내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느새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아이 입장에서 내 반응을 돌아봤다.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에 대해 아빠를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 있다. 바람직한 것과 해로운 것을 여러 방식으로 알게 된다. 그런데 사실 아빠인 나는 어떤 것이 바람직하고 어떻게 배우면 좋을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나쁜 습관이 없고 사회성이 적절히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거친 밑그림만 있을 뿐이었다. 책 몇 권과 유튜브 영상들을 통해 소위 요즘 아이를 키우는 방법을 공부했지만 일상에서 잘 적용하지 못했다. 그게 정말 내 아이에게 맞는 것인지, 적절한지 생각해볼 여력이 없었고 만들지도 못했다.
그나마 아내와 대화하며 시작한 고민에 진전이 있었다. 자녀의 미래에 대해 일치한다고 확인한 점은 아이가 좀 더 여유롭고 넉넉하며 베풀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평소에 좀 더 누리고 경험하며 나름의 생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어른이 생각하는 답을 찾게 하거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의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이런 생각은 분명 중요하지만 실생활에서 세부적인 지침을 주지는 못했다. 내가 이런 부분이 답답했던 것을 보면 아이의 행동들을 질문의 시작이 아니라 끝으로 여겼나 싶다.
아이에 대한 분노는 실은 내가 원인일지 모른다. 아이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해답을 찾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어하는 내 성격 탓이 크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쩌면 육아는 답이 없거나 찾기 어려운 물음일 수 있다. 전문가의 경험과 조언이 유용하지만 어쨌든 내 아이에 대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항상 적절히 대응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니 내 생각이 정답인 것처럼 아이에게 했던 행동은 어떤 면에서 어설픈 혈기였다. 직면한 상황에 힘껏 반응하고, 자주 돌아보며,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인지 계속 모색하는 것이 내가 할 전부 같았다.
이것이 비단 아이의 문제던가. 적어도 내 인생에 관해서는 이보다 더 진지하고 치열했다. 반면 아이의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여유를 갖고 다가가지 못했다. 나름대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내 부끄러움으로 바뀐 대목이다. 시선은 낮추고 마음은 넓힐 필요가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작은 수고이고 아이 입장에서는 큰 변화겠다. 이런 접근이 적어도 기쁨과 감사의 가치를 배우게 해 준 아이들에 대한 아빠의 도리가 아닐까 한다. 나는 늘 철들기 싫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아이를 돌보며 생각할수록 내 안에 무언가가 자라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이 몰라보게 커갑니다.
저도 그 사이 얼마나 컸는지
마음의 키를 대보고 싶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