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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Apr 07. 2020

아이들과 목욕할 때만 추는 춤

아빠만 볼 수 있는 춤이에요

아들을 낳아보니 5살 무렵부터는 아빠와만 함께 목욕을 할 만하다. 그전까지는 기저귀를 차서 아기 같은 느낌이 강하고 손도 많이 간다. 그런데 이 즈음부터는 기저귀 없이 배변을 처리하기 시작하고 무언가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강하게 보인다. 내 두 아들은 목욕하는 시간에도 주도성을 갖고 싶어해 자연스럽게 함께 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올해부터 남아가 여탕에, 여아가 남탕에 들어갈 수 있는 최소 연령이 만 4세로 줄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유리벽이 세워진 작은 샤워 부스에 두 아이와 함께 서서 씻었던 시간이 시대를 앞서갔던 일이 됐다.


우리네처럼 맞벌이하는 아빠 엄마는 퇴근 후 아이들과 저녁식사 못지않게 씨름하는 것이 씻기는 일이다. 요즘처럼 따뜻한 날이면 아이도 야외에서 봄새처럼 지저귀고 나부댄다. 그러면 자야 하는 늦은 밤이라도 꾀죄죄한 얼굴로 방에서 뒹구는 아이를 씻기지 않을 수 없다. 직장 생활에 진력을 다해 내 몸 씻을 여력조차 없을 수 있다. 그래도 내일 저 몰골로 돌아다니게 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등을 떠민다. 안 씻겠다고 도망치다 잡혀 버둥거리는 아들들을 아빠가 하나씩 옷을 벗겨 목욕하는 곳에 들여보낸다. 마치 놀이공원에 입장하듯 소리를 지르며.


샤워기 하나로 씻는 공간에 워터 테마파크 못지않은 추억이 있다. 물로 하는 장난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두 아들이 깔깔대며 웃고 놀기에 바쁘다. 물이 차면 찬대로 뜨거우면 뜨거운대로 난리법석이다. 머리를 감겨주면 비눗물이 눈에 들어간다고 엄살을 부리고 옆에 있는 아이는 구경하기 바쁘다. 뜨거운 김이 묻은 유리벽에 그림을 그리다 입안에 있던 물로 지우기도 한다. 둘이서 누가 더 높이 뛰는지 시합한다며 뛰어올라 손바다 자국을 만들기도 한다. 아이가 나를 닮은 것인지, 내가 아이를 닮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도 그 깨방정에 함께 한다.


그 흥을 사랑한다. 아이들이 때 묻지 않게 웃을 수 있어 감사하다. 나는 목욕을 원치 않는 아이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몸짓을 과장되게 하거나 말투를 재밌게 바꾸고는 했다. 이게 시작이었다. 그런데 의도한 것보다 더 크게 웃고 반응해주니 되레 내가 더 신났다. 목욕은 그 틈틈이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는 과정이다. 처음엔 몸이 찌뿌둥해 얼른 해치우려고 했었는데 하다 보면 나도 같이 웃고 떠들고 놀고 있다. 나중에는 흥이 넘친 아이의 몸짓에 아이디어를 얻어 '물털기춤'을 창안했다. 방방 뛰며 강아지처럼 온몸을 터는 이 춤은 목욕의 마무리 의식이다.


그 자유롭고 제약 없는 몸짓은 아이들의 놀이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큰 희열을 느낀다. 나와 함께 한 그곳이 설령 샤워장일지라도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런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다른 누가 이것을 알 수 있을까. 아내에게 농담 삼아 나만 안다고 얘기했을 만큼 내 인생이 발견한 비밀한 즐거움이다. 단지 아이들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타인에 대해서는 얼마나 클지 짐작도 안된다. 쥐어짜낸 무언가가 아니라 우러나오는 즐거움과 여유를 만들고 싶어졌다.


지금은 그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르겠다. 인생의 길을 찾는 구도자다. 다만 요즘 글 쓰는 일이 아이들과 하는 목욕만큼이나 즐겁다. 내가 무심코 지나갔던 과거를 잠시 돌아보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보석을 하나씩 캐는 중이다. 아이들에게서 의도적으로 얻어냈던 것이 아니었듯 지금 내 인생에 주어진 기회와 순간들을 그저 즐기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내 의식을 깨우고 정열을 행동으로 바꾸도록 흥을 주는 순간들을 좀 더 길게 기억하고자 글을 쓴다. 언젠가 이 글을 돌아보며 누군가 잠시 쉬다 갈 인생의 놀이터를 만드는 나를 만나길 기대한다.


기쁨과 즐거움을 받기만 하던 제가,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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