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정체성을 돌아보다
일상이 어떤 틀에 갇히면 그 바깥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지난 7년간 보냈던 직장 생활 중 대다수가 이 문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속한 회사와 그곳에서 이미 관습이 된 어떤 것이 나를 조용히 끌어갔다. 환경이 나를 정의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이 나를 설명했다. 성격상 수동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주어진 책임과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본래 나 자신이 아닌 그 조직에 어울리는 나를 만들도록 유도했다. 여기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속한 곳을 몇 차례 바꾸게 되면서 느끼게 됐다. 내가 사용했던 언어 중 많은 부분이 그 회사에서 자주 사용했던 단어들이었다. 그곳을 나오면 옷을 벗는 듯 허전했다. 정말 채워야 할 것이 내 안에 없는 기분이었다.
한 번은 회사에서 사업부제란 제도를 도입했다. 역할 별로 나눠져 있던 팀을 사업 별로 재구성해 수익성을 극대화하려는 취지였다. 발전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경쟁적인 분위기 탓에 자기 사업부끼리만 뭉칠 뿐 다른 사업부와 교류나 협력을 하지 않게 됐다. 어떤 면에서 퇴보한 셈이다. 매출도 첫 2년만 늘고 나머지 2년은 뒷걸음질해 다시 처음 수준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이 과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신규 팀장으로 일하며 타 사업부에 거래를 요청할 때 받았던 텃세에 마음이 좋지 않았던 적이 더러 있었다. 한 회사의 지붕 아래 있으면서도 내부의 논리를 따라 편을 가르며 남들처럼 완고 해지는 내 모습을 보게 됐다. 영향을 받고 있었다.
여파가 있는 것을 알든 모르든 마음은 내가 보고 듣는 것의 지배를 받았다. 솔직히 어떨 때는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되갚아 주고 싶고, 굳이 내가 더 제안하거나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생겼다. 주변의 마찰과 부정적인 변화를 보며 안타까워할 뿐 나서서 뭔가 바꾸거나 의견을 내지 못했다. 타인에 대해 어떤 면에서 실망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고자 마련한 자리에서도 대다수가 침묵했다. 뭔가 발전적인 의견이 없었다. 나는 처음 참석했을 때 이런저런 말을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 왜 이런 분위기였는지 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의견을 낸다고 뭔가 바뀌거나 더 좋아지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현실 속에 잔뜩 움츠린 나 자신을 보게 됐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본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란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들었다. 잘 웃고 익살이 있으며 재치와 재미있는 대화를 좋아했다. 이런 내 모습이 회사 속에 있을 때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나를 보고 회사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분도 나와 동일한 상태였던 것 같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거나 찾으려고 하지 못하고, 그저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내 생각과 감정이 그 영향력 때문에 너무 쉽게 변하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회사 속 여느 사람처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내 정체성을 깊이 생각하게 됐다. 돈은 꾸어주지 못할지언정 좋은 영감을 나눠주겠다고 했던 젊은 시절의 패기를 떠올렸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추구하고자 했던 좋은 문장들을 뒤적거렸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던 폴 발레리의 말,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하고 했던 사무엘 베케트의 말, '소유냐 존재냐'를 물었던 에리히 프롬의 말이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인생에서 갖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톺아보며 살 때, 혹시 원치 않은 실패를 할지라도 나란 존재를 형성해가는 좋은 과정으로 바라보는 인식이다. 신앙에서조차 세상의 빛이자 소금이었다. 보고 맛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나는 마음의 갈림길에서 옳은 방향을 선택하기로 했다. 명언이든 조언이든 비판이든 남이 뭐라고 말하는지 듣는 것도 중요했지만, 결국 내 인생의 순간순간에 어떤 것을 선택할지가 더 중요함을 알았다. 보이는 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살 것인지 자문했다. 나는 온몸으로 답했다. 내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만 보며 더 이상 살지 않겠다고. 나란 사람이 본래 가진 것을 드러내고 추구해야 할 바를 따라 살겠다고 다짐했다. 아직 모호하거나 미처 정리되지 않은 영역이 없지 않다. 그런들 어떠한가. 이 또한 내 정체성의 일부다. 지금, 오늘, 이 상태 그대로 영향을 주며 살기 원한다. 이것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는 이유다.
좋은 질문을 그러모읍니다.
기죽은 마음을 일깨우고
멈췄던 생각을 움직이며
잃었던 의지를 되살리고
인생의 내일을 일으키는
그런 물음을 더 자주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