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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gene Sep 23. 2022

일곱 번째 만남에 대중교통 데이트가 땡긴다면

버스기사의 어떤 날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자가 함께 가자고 한 전시회에 남자는 동행하지 않겠다고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서운해했고, 남자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나는 운전할 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좋아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다. 운전하는 것이 좋아 이를 직업으로 삼았고, 버스 전용 도로는 언제 어느 시간에서든 밀리지 않는 길을 갈 수 있어서 광역버스를 선택했다. 일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고요함을 벗 삼아 운행하지만, 때때로 졸음이 밀려올 땐 승객들의 대화가 업무시간을 채워주기도 한다. 


 오늘은 일하기 싫을 만큼 유난히 날씨가 좋은 봄의 하루였다. 으라차차 힘을 내서 모든 좌석을 점검한 후, 운행을 시작했다. 이윽고, 버스는 모란역을 지나고 있었다. 한산한 토요일 아침, 나의 주황색 광역버스 9403에 세 번째 승객으로, 한 남녀가 성남시청 정류장에서 승차했다. 그들은 운전석 대각선 방향의 맨 앞자리에 착석했다. 


  운전석 바로 뒤에는 나를 보호하기 위한 아크릴 가림막이 있기 때문에, 승객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는다. 반면, 대각선 좌석의 맨 앞자리 승객의 대화는 비교적 잘 들리는 편이다. 이는 내가 고요한 상태에서 운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승객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 주말 아침, 이 커플은 맨 앞자리에 앉아 상기된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했다.


여: 오늘 날씨 미쳤다~

남: 그러게, 이대로 집에 가기엔 좀 아쉽긴 하다. 

여: 그러니까.. 나랑 같이 전시 가자고!!!

남: 이번 주 회사에서 너무 바빴어서, 주말 동안 책 봐야 할 것 같아. 다음에 전시 보러 갈 때, 꼭 같이 가자. 

여: 응…. 그래…


 순간, 내가 잘 못 들었나? 귀를 쫑긋 세웠다. 책을 읽어야 해서 이런 아름다운 날씨에 데이트를 마다하고 집구석에 들어간다는 남자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운전을 미치도록 좋아하고, 애인이 없는 나도, 뛰쳐나가고 싶은 이런 날씨에 말이다. 고요한 사운드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가만히 고요하게 있는 활자보단 움직이는 시각 영상을 즐겨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 읽기 좋은 천고마비의 계절도 아닌, 화창한 봄 날씨의 주말에,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남자의 말에 화까지 나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 살짝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색, 정갈한 7:3 가르마의 머리 스타일, 유난히 큰 귀를 가진 남자였다.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긴 했지만, 책을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주말에도 꼭 책을 읽어야 하는 직업인 걸까? 미치도록 남자의 직업이 궁금해졌지만, 그들의 대화에선 남자의 직업을 유추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한 이후로, 남녀 모두 모란역에서 잠실역까지 가는 동안 고요했다. 내가 좋아하는 고요한 시간을 지켜주어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남자가 괘씸했다. 이런 아름다운 날에 여자 혼자 쓸쓸한 시간을 보내게 하다니… 


 여자는 먼저 하차했다. 석촌역 정류소에서 여자는 먼저 내렸다. 남자에게 “그럼 주말 동안 책 잘 봐요.”라며 약간 비꼬는 듯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손 인사를 했다. 남자는 잠시 졸더니, 중곡동 사거리에서 하차했다. 


 화창한 주말에 책을 온종일 읽어야만 하는 남자와 만나고 있는 여자의 미래를 상상하며, 9403 버스는 동대문을 거쳐, 종점인 분당 구미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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