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엄마를 추억하다
기대했던 스위스 여행이 별다른 감흥 없이 끝이 났다.
매일 좋은 것만 보고 새로운 것을 접하다 보니 마음이 동요되는 순간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아무래도 장기 여행자들에게 감기처럼 온다는 여행의 권태기가 찾아온 것 같다. 더 이상의 여행은 무의미할 것 같아 우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수도 사라예보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이동할 다음 도시를 찾았다. 구글 지도를 켜고 관광지가 아닌 곳으로, 이름이 끌리는 도시를 선택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객기였다.
‘트레비네’
관광지가 없는 이 도시의 평범함이 좋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아파트를 예약했다. 여기저기에 짐을 풀어나도 되고, 코 고는 사람 때문에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놔도 없어지지 않는 게 정말 좋았다. 호스텔에 머물던 그때는 우리의 이름을 써놓아도 음식이 자주 사라졌다. 아침에 시리얼과 함께 먹으려고 넣어 놨던 우유가 사라진 날은 범인 색출을 위해 호스텔 스탭에게 CCTV를 돌려달라는 말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차올랐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 우리 집 냉장고 문짝에는 흰 우유와 오렌지 주스가 항상 있었다. 요구르트 아줌마처럼 주스를 배달해 주시는 아주머니들이 계셨던 그때, 델몬트와 썬키스트는 주스계의 양대산맥이었다. 엄마는 델몬트 보단 썬키스트 훼미리 주스를, 포도주스 보단 오렌지 주스를 선호했다. 설탕이 많다는 이유로 포도주스는 절대 먹지 못하게 했다. 그때 오렌지 주스 유리병에는 무가당이라는 글자가 크게 붙어져 있었다. 우리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었을 엄마였지만 미안하게도 지금의 나는 오렌지주스 보단 포도주스를 더 자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