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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별 Dec 22. 2022

여행, 고통을 망각하는 시간

비행기를 타고 먼 곳에 가고 싶었다. 떠날 수 있다면, 그 어떤 곳이라도 좋았다. 제주도에 2년 넘게 살면서 한 달에 1~2번은 서울을 오갔기 때문에 지겹도록 비행기를 탔었다. 이제 내게 비행기 타는 일은 여행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 단순한 운송수단에 불과했다. 비행기를 통해서만 육지에 갈 수 있는 섬사람이 된 후, 비행기 로망이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늘 여행만은 그리워했던 것 같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단 하나, 현실을 망각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행은 현실을 잊게 하는 가장 좋은 마취제가 아닌가. 낯선 곳에 가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또 그곳을 즐기기 위해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여행에는 그런 강력한 기운이 있었다. 아무리 편한 마음으로 가더라도 약간의 긴장감과 설렘을 주는, 여행이 주는 낯설고 생경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다. 이번에 나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현실로부터 도피 혹은 회피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내가 아주 낱낱이, 피부 깊숙이 느끼고 있는, 이 세밀한 고통에 대해 잠시라도 피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단 며칠만이라도!  혼자 가는 여행은 용기가 나질 않았는데 다행히 언니가 동행해 주기로 했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가게 된 곳은 베트남의 대표적인 휴양지, 나트랑.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떠나온 나는, 조금은 편해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행의 목적을 반은 달성했고, 반은 실패한 것 같았다. 어떤 기억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었으나 사소한 조각들이 오히려 그 기억으로 데려다 놓는 일이 많았으므로. 비로소 떠나왔다는 사실을 체감할 때면, 현실감이 사라지면서 멍해지기도 했다. 떠나왔다는 것이 한편으론 안심이 되면서도 불편한 감정을 깨우기도 했다.      


원래부터가 계획형 여행가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더더욱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았다. 오로지 리조트를 즐기는 여행, 호캉스와 수영에만 목적을 두었다. 호캉스는 쉬고 싶다는 마음을, 수영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여행지에서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틈틈이 읽었다. 작가의 글 속에선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물건에 대한 기억을 쓴 글에선, 간지러운 내 마음을 누군가 긁어주는 것만 같았고, 고요한 위안을 주었다.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 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김영하 산문집 <여행의 이유> 64~65P에서 발췌 -

 

남편이 하늘나라에 가고 난 뒤, 나는 그와 살던 제주에서의 삶을 빨리 정리하고 도망치듯 육지로 올라왔다. 제주에는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곳에는 아로새겨진 추억이 너무 많아, 매일 오가던 길에서 넘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 된 것 같았다. 상처의 속살을 제주 바닷물에 절여 씹어 먹겠다는 확고한 의지 없인, 쉽게 그곳에 갈 수 없을 것만 같다. 적어도 지금은.   

   

짧은 순간, 제주도의 하늘과 나트랑의 하늘이 겹치고 눈물이 반짝였다. 정신을 차리면 물 위에 떠 있는 나로 돌아왔다. 지금 나는 베트남의 어느 5성급 호텔 수영장, 선 베드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모히토를 한잔하고 있다. 시원한 물 위에서 튜브를 끼고 '둥-둥' 떠다니며 이국적인 풍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나는 넓은 수영장에서 배영 자세로 팔을 넓게 펼친 채 언제까지나 파란 하늘만 쳐다볼 기세였다. 


가히 여행은 고통을 망각하기 좋은 방법 중이 하나였다. 일정이라고는 일어나서 먹고-놀기-쇼핑-마사지-또 먹기로 나름 빽빽하게 짜여 있었다. 생각이 기어 나올 틈 없이 먹고 계속해서 놀 작정이었다. 수영을 하고 난 뒤에, 스낵바에 가서 '무료로 나오는 햄버거를 먹을까?' '쌀국수를 한 그릇 때릴까?'와 같은 시답잖은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스낵바의 간식 타임이 끝나면 라운지에 가서 '어제 못 먹어본 칵테일을 시켜봐야지.' ‘내일은 시내에 나가서 마사지받으면 좋을 것 같은데, 시간이 될까?’ 의미 없는 일들만 생각하고, 말해도 시간은 잘 흘러갔다.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도망쳐왔지만, 그래도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었다. 자주 그와의 추억이 스쳤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앞으로 이제 다시는 그와 함께 할 수 없는 일이 이렇게 많다는 게, 나는 무언가를 상실했구나, 감각하게 했다. 감각할 수 있는 상실은 그래서 온전히 망각될 수 없었다.   

    

다만, 무언가로부터 ‘잠시 떠나오기’라는 과제를 절반은 해치운 기분이었다. 과거의 기억이나 상처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자발적인 거리 두기를 통해 다시 일상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이번 여행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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