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숨의시간 14화

존버하다 보니 살고 있더라

존버하는 삶에 관하여

by 잔별

'존버'만이 우리를 살게 한다. 결국 인생은 인내심 싸움이다.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것이 없어도, 어느 날 불현듯 불행이 찾아와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애나 결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리하여 생각대로 인생이 폼나지 않게 펼쳐지더도 버텨야만 한다. 버티는 자에게만 그다음 챕터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존버의 유래'를 짚고 넘어가자. 보통 우리는 '존버'를 '존나 버티기'의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사실 존버의 유래는 '존나 버티기'의 준말이 아니라 '존나 버로우'의 준말이다. 여기서 버로우는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저그 종족이 사용하는 그 버로우다. 땅 속으로 버로우해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 나무위키에서 풀이를 인용해서 사용함)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나 버티기' 가상화폐나 주식이 오를 때까지 존버서 가격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버티자는 말로 많이 사용했지만, 그러다가 개박살 나는 경우가 요즘엔 존나 많기 때문에, 일반인 사이에서 통용되는 투자적인 관점보단, 실제 우리 삶에서 '존버'가 필요한 순간이 더 많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땅 속으로 버로우해서 나오지 않는 시간은, 인생에서 분명 필요하다.


정말 큰 불행이 왔을 때 사람은 목적이나 방향성을 잃는다. 그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댄다.

이럴 때, 가령 힘든 위기나 아픔, 시련이 닥쳤을 때 자기만의 굴을 파고 들어가서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는 때를 기다려보는 것. 이는 오직 살기 위해 멈추는 시간이며, 정상적으로 다시 세상과 마주할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오랫동안 존나 버로우(burrow)를 하고 있다가, 어제는 나를 걱정해 주는 친한 동생을 만나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간의 아픈 얘기들부터 서로의 안부와 세상을 향한 원망과 서로가 겪은 말도 안 되는 일들에 격분, 대노하면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셨다.


집으로 가는 길.

오랜만에 건너는 강변북로의 야밤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이 예쁜 조명들이 원래 여기에 있었던 거였나 아니었나를 생각하다가, '삶은 그저 이렇게 버티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버티다 보니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는 거구나. 그러다 보면 괜찮아지고, 심지어는 아주 좋아지는 날도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이 아름다운 서울 야경은 그저 살짝 거들뿐... 그래도 센치함이 나를 해하지 않는 선까지만 감탄했고, 그 감정을 실어 글을 쓴다.


애쓰면서 살지 말자고 다짐하는 날이 여러 날이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애쓰다'와 '버티다'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혹은 과하게 애쓰지 말자는 의미로 '애쓰다'를 쓰고 있고, 힘든 일이 있어도 조금 버텨보고 지금의 위기나 상황을 잘 넘겨보자는 의미로 '버티다'를 쓰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애쓰지 않으면서 버티는 삶'에 관해 자주 생각할 참이다. 버텨야 다음이 있으니까. 별 것도 아닌 사실이지만, 그래서 더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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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그 종족들은 그 유용한 기술을 그동안 잘도 써먹고 있었네. 역시... 앙큼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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