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오(Casio)의 모델 F-91W는 생활방수 스펙에도 불구하고 전설이 많다. 사진은 세탁기에 돌려지는 중인 F-91W(Avg. Joe Watch Reviews의 유튜브 캡처)
진심이야? 꼭 지금 시계를 차야겠어?
바로 어젯밤 내게 일어난 일이다. 나는 아직까지는 코를 골거나 이를 갈지는 않지만 대신 잠을 잘 때 많이 뒤척이는 편이다. 분명 바른 자세로 잠이 들었다가도 일어나 보면 엎드려있고 그렇다. 어젯밤에도 잠을 자다가 뭔가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잠결에 허둥거렸다. 무슨 일이었냐 하면,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잠들었다가 잠결에 시계를 벽에 냅다 박아버리는 소리였다.
굳이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데 굳이 그러는 일이 잦은 편이다. 베이스 기타를 배우겠다던 중학생 시절, 왜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베이스 기타를 품에 꼭 안은 채 잠을 청했고, 결과적으로는 베이스 기타에 몸이 눌린 채로 잠을 잤다. 그래놓고도 설마 베이스가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까 봐 한 시간마다 깨서 품 안의 베이스를 확인하곤 했다.
시계를 풀어놓고 베이스를 내려놓고 잠에 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생각은 했더라도 무슨 고집이 생긴 건지 시계를 차고 베이스를 품에 안고 자겠다고 버텼다. 그 결과 어젯밤 같은 사단이 벌어졌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간밤에 벌어졌던 그 사단이 기억나서 허겁지겁 시계를 살폈으나 다행히도 시계는 흠집 하나 없었고 작동도 멀쩡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람이 한 둘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도 그럴 게 시계 커뮤니티 활동 당시, 샤워하다가 자신의 시계를 찍은 사진이나, 세면대에서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속에 시계를 가져다 놓고 찍은 사진을 심심찮게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내가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는 것뿐이었으니까.
나도 시계를 차고 샤워를 해보았다. 그러나 이건 시계를 풀기가 귀찮았다던가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건은, 뭐랄까, 실험의 일종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 시계가 수중에서 200m의 기압을 버티도록 만들어졌는데 과연 그게 사실인지 내가 직접 실험에 보겠다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러한 실험에 임하는 자세는 퍽 진지하다. 전라의 몸으로 시계 하나만을 걸치고서 꽤 비장한 표정으로 샤워실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샤워가 끝나면 자신의 몸에 묻은 물기를 채 닦기도 전에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시계가 잘 가는 것을 보며 한 번 흐뭇한 미소를 띠고 그제야 몸의 물기를 닦는다. 실험 하나가 성공리에 종료된 것이다.
사우나와 수영장, 바다 또한 이러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장소다. 사우나는 그 열기 때문에, 수영장은 그 활동성 때문에, 바다는 그 염분 때문에 시계 실험에 있어 적절한 장소라고 취급된다. 만약 사우나에 굳이 범상찮아 보이는 시계를 차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거나, 수영장에 혹은 바다 물놀이에 어울리지 않는 희한한 시계를 차고 나온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름대로 실험을 하며 경험적 데이터를 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굳이 이런 환경에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시계에는 제일 좋다. 특히 기계식 시계는 충격과 습기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이 실험이 그 시계에게는 생전 마지막 나들이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시계의 내구성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기행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시계가 내 곁에서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 그렇기에 이 시계가 내가 사우나를 가던, 수영장을 가던, 바다를 가던 함께 내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 나의 모든 것을 받아주길 바라는 이런 마음일 것이다. 물론 언제 그 마음이란 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서 시계가 온라인 중고 시장에 매물로 올라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나와 함께 영원한 미래로 나아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인 것이다.
시계의 내구성은 실험해보고 싶지만, 그 실험이 시계의 내구성을 깎아먹을 수도 있다. 이러한 딜레마가 생기기 때문에 결국 나는 유튜브로 실험영상을 찾아보거나 구글로 실험결과를 검색해 본다. 놀랍게도 어디에서나 그런 걸 원하고 궁금해하는 인간들이 있고 또 많아서인지 그런 콘텐츠가 없지는 않으며 한 두 개씩은 꼭 검색되기 마련이다. 개중에는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직접 실험해 보며 이 전설이 실재하는 것이었음을 밝히기도 한다. 가히 시계 업계의 슐리만이다.
진심이야? 꼭 지금 시계를 차야겠어? 나는 매일 나 자신에게 묻는다. 굳이 지금 시계의 스크루다운 크라운이 제대로 잠겨있는지 확인해야겠냐고, 굳이 지금 시계의 베젤을 돌려보며 베젤의 작동이 멀쩡한지 확인해야겠냐고, 굳이 지금 5분 전에 한 짓거리를 또 해야 마음이 편안하냐고 묻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또 하고야 만다는 것이고, 시계의 내구성에 제일 위험한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시계인이라는 사실만 다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