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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Aug 07. 2023

어차피 지샥 찰 거면서 TPO 같은 소릴

지샥(G-Shock)의 GA-2100-1ADR을 차고 탭댄스를 추는 나 자신


어차피 지샥 찰 거면서 TPO 같은 소릴




요즘 쓰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OOTD(Outfit Of The Day, 오늘 입은 옷차림) 이전에 TPO(Time, Place, Occasion)가 있었다. 때와 장소와 시간에 맞게 옷을 입자는 뜻으로, 보통 '옷의 TPO를 맞추다'와 같이 쓰였던 말이다.


시계도 하나의 액세서리라서 그런지 TPO 또한 신경 쓰게 된다. 예를 들어 나는 탭댄스를 춘다. 다들 탭댄스가 발만 동동 구르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생각보다 전신 운동이다. 상체를 받쳐주는 하체가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상체도 저절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동작은 발의 원활한 스텝을 위해 상체를 움직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학원에 갈 때 나는 보통 내 기계식 시계를 집에 고이 풀어놓고 간다. 물론 구글에 시계의 충격 방지 기능과 충격에 대한 내구성을 검색해 봤고, 생각보다 기계식 시계가 충격에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러 내 시계를 그런 시험에 들고 싶게 하지는 않았다. 마치 내 시계가 수심 200m의 기압을 버틸 수 있는 방수성능을 지녔다고 해도 굳이 샤워할 때 차고가지 않는 것과 같다. 물가에 애를 놔두는 것도 걱정인데, 시계를 굳이 물가에 놔둘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일주일에 두 번씩 탭댄스를 가는 날이면 나는 퇴근하고 집에 들러 꼭 지금 찬 시계를 벗어두고 지샥(G-Shock) 시계를 찬다. 군생활 기간 동안 내 옆을 지켰고, 지금은 케이스에 이리저리 흠집과 상처가 나 있지만, 여분의 케이스와 시계줄이 마련되어 있는 나의 전천후 시계 GA-2100-1ADR, 일명 '지얄오크'. 물론 시계 자체를 풀고 탭댄스를 가능 방법도 있겠지만, 곧 죽어도 내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차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렇게 땀에 푹 젖어서 집에 돌아오면 우선 흐르는 물에 지샥 시계부터 씻고 그다음에 샤워 준비를 한다.


또 다른 경우: 요즘은 도통 못 갔지만, 나는 가끔 비치 클리닝(Beach Cleaning)에 참여한다. 즉 해변에서 쓰레기를 줍고 치우는 해변 청소 활동이다. 아무래도 활동의 특성상 시계가 평소보다 긁히거나 충격에 노출될 위험도가 높다 보니, 꼭 그 활동을 갈 때면 시계함 앞에 서서 고민을 한다. 이 시계는 사파이어 크리스탈이 아니라 아크릴이어서 흠집이 엄청날 텐데. 이 시계는 유광 폴리싱 처리가 되어있어서 흠집이 조금만 나도 눈에 더 잘 띌 거야. 그렇다고 오늘 지샥을 차기는 싫어. 이번엔 좀 색다른 걸 차고 싶은 기분이란 말이지. 나는 이것저것 들어보고 손목 위에 올려보며 무엇이 가장 '적절한' 시계일지를 고민한다.


이런 상황도 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주로 카페에서 일을 해왔다. 시계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카페 일을 해온지라, 시계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연스레 카페에 차고 갈 시계를 고르게 되었다. 다들 짐작할 수 있는 카페 업무의 특성상 물을 다룰 일이 많고 어디 부딪힐 일이 생긴다. 즉 일을 하면서 1번 이상은 물에 두 손을 푹 담가야 하고, 밀려오는 주문에 서두르다 보면 냉장고든 기둥이든 간에 1번 이상은 꼭 손을 부딪히게 된다. 그러니 비치클리닝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시계함 속 시계들을 속으로 재게 되는 것이다. 얘는 좀 아깝고, 쟤도 좀 아깝고, 이걸 어쩌지.


탭댄스, 비치 클리닝, 카페 아르바이트. 세 경우 모두에서 나는 각 상황에 어떤 시계가 좋을지 고민한다. 이 과정을 거치며 나는 자연스레 내 시계를 판단하는 나름의 기준을 세운다: 아까운 시계, 만만한 시계, 만만하지만 그렇다고 아깝지 않은 것도 아닌 시계.


보통 아까울수록 시계의 가격대가 높고 만만할수록 가격대가 낮다. 이외에도 시계에 사용된 소재가 무엇인지(베젤의 소재가 스크래치에 강한 세라믹 소재인가 아니면 빈티지 풍을 위해 채택했으나 스크래치에 약한 알루미늄 소재인가), 시계의 마감에 사용된 방식이 무엇인지(시계가 그냥 스테인리스 스틸인가 아니면 검은색 PVD 코팅이 되어있어서 벗겨질 위험이 있는가), 그리고 시계의 작동방식이 무엇인지(여러 가지 부품들로 이루어진 대신 충격에 약한 기계식 무브먼트인가 아니면 배터리로 움직이는 대신 충격에 강한 쿼츠식 무브먼트인가) 등등에 따라 분류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내 시계의 TPO를 맞춘다. 그러나 문제는, 탭댄스를 하던지 비치 클리닝을 하던지 카페 일을 하던지 결국 뭐 됐든, 지샥을 차고 나간다는 것이다.


시계인이 '데일리'라는 말 혹은 '전투용'이라는 말을 언제 가장 많이 쓰는지 아는가? 바로 새로운 시계를 살 때다. 가령 이런 경우다. 알리 익스프레스나 혹은 네이버 스토어에 올라온 어떤 시계 A를 발견한다. 시계 A의 디자인과 성능이 꽤 괜찮으며 무엇보다 가격에 접근가능하다. 나는 고민에 빠진다. '이 시계를 사면 어떨까?' 하지만 나에게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나는 이미 시계 A와 비슷한 디자인의 B, C, D가 있고, 시계 A의 가격이 아무리 접근가능하다 한들 이 시계를 사면 다음 월급날까지 생활비가 매우 빠듯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선뜻 사기에는 조금 주저하게 되는데, 그때 꼭 '데일리'나 '전투용' 같은 말을 가져다 쓰는 것이다. 저 시계는 매일 아무런 부담 없이 찰 수 있을 거라면서, 막 써도 전혀 걱정되지 않을 거라면서, 그러니까 저런 시계가 하나 있어도 나쁘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이때 이 단어가 나에게 주는 효과는 정확하게 '과한 소비에 대한 죄책감을 줄이고 이 소비를 합리적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시계의 TPO는 분명 있다. 예를 들어 드레스 시계 같은 경우에는 직장이나 파티처럼 사람들과 대화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필드 시계나 다이버 시계 같은 경우는 스포츠처럼 좀 더 활동적인 장소와 때에 어울린다. 그러나 문제는 이 TPO를 고려한다면서 시계를 사면서도 결국 내 손목 위 지분을 제일 많이 차지하는 시계는 따로 있다는 것이고, 내 시계함 속 자리는 끊임없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시계의 TPO를 맞추는 일은 더 많은 시계의 구매와 하등 상관이 없음을 내가 더 깨우쳐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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