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효우게모노(효게모노, へうげもの)라는 작품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2005, 야마다 요시히로 원작; 2011, NHK 방영). 작품은 주인공 후루타 오리베를 중심으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잇는 시대를 조명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 야마다는 당시 시대상 속에서 만들어지는 다도(茶道)와 같은 취미상과 이를 정립하는데 기여한 센노 리큐(千利休) 같은 인물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작품 속에서 리큐라는 인물이 너무 매력적이었던지라 나는 당시 대학에 있었던 다도 수업도 듣고, 따로 다도 학원을 찾아가 수업을 듣기도 했더랬다. 인상적인 것은 16세기 일본의 시대상 속에서 다완(茶碗)이라는 다도의 도구가 갖는 위상이었다. 유약이 제멋대로 흐르고 금이 간 고려다완의 모습 속에서 리큐와 후루타, 도요토미는 어떤 미(美)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투박한 모습 탓에 도요토미를 찾아온 한국의 외교관들이 일본의 다완을 비웃는 모습이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일본에서는 이 투박함 속에서 와비(詫び, わび)와 같은 조용함의 미학을 발견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오늘, 공교롭게도 <노량: 죽음의 바다>(2023, 김한민)가 극장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다. 많관부.
미학과 미감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혹시 독자 중에 수석(壽石, 水石)을 모으는 사람이 있을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수석이란 ‘강이나 바닷가의 돌밭 또는 산중에서 기이하게 생긴 돌을 수집하여 그 묘취를 즐기는 취미'를 일컫는다. 나는 영화 <기생충>(2019, 봉준호)을 통해서 본 수석이 가장 인상 깊었지만, 은근히 주변에 수석을 취급하는 사람과 상점이 있다는 것을 최근 깨달아가고 있다. 수석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돌에 새겨진 ‘그림’을 해석하고 이를 감정하는 미학을 살짝 엿보다 보면, 물에 씻겨나가며 만들어진 돌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해 내는 미감에 순수히 감탄하게 된다.
16세기 일본의 미학을 보고 듣고 맛보면서, 그리고 돌에 새겨진 그림과 이를 보는 사람을 떠올린다. 인간이란 많은 것을 좋아할 수 있다. 나 역시도 좋아하는 게 많고 그래서 좋아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목록이 있다. 차를 즐기는 다도(茶道), 향을 즐기는 향도(香道), 술을 즐기는 주도(酒道). 이 단어들 속에는 공통적으로 길 도(道)가 들어간다. 나는 이것을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배움의 길(道)에는 끝이 없다는 금언처럼, 즐기는 것 또한 배울수록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그림 보는 것, 책 읽는 것, 영화를 보고, 전시를 보고, 공연을 보는 걸 좋아한다. 누구는 또 다르다. 옷을 좋아하고, 가방을 좋아하고, 팔찌나 반지를 좋아하고, 우표를 좋아하고, 옛날 화폐를 좋아하고, 하물며 테이크아웃 할 때 쓰는 종이컵홀더도 좋아해서 몇백 개씩 모은다. 이것이 단순한 물신주의(fetishism)라면 그런가 보다. 이 시대적 조건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그 와중에 시계인가. 내가 뭐 하다가 이 돈 많이 드는 취미에 코가 꿰었는지 모르겠다. 예전보다야 충동도 줄었고, 그래서 무분별한 시계 소비도 안 한다지만, 무분별하게 늘어나는 시계줄을 보다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여기에도 와비(わび)가 있을 것이다. 이 마구잡이 속에서도 내가 무언가 깨우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