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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경 Dec 23. 2023

내 친구의 시티즌 시계

내 친구의 시티즌(CITIZEN) 시계 AT9031-52L(大咖星选)


내 친구의 시티즌 시계




시계를 어떻게 좋아하겠냐는 질문을 들으면, 나는 항상 고등학교 때 받았던 스와치(Swatch) 시계를 고치면서부터였다고 말했다. 이 대답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었지만, 문득 오늘 그 대답이 반쪽짜리였음을 떠올렸다. 그 반쪽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 그와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함께 했다. 그러나 내가 여성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러면 으레 따라붙기 마련인 가치관의 대립이 생겼다. 그래서 성인이 되었을 무렵 서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기로 하고 갈라섰다.


내가 기억하기에 그는 항상 시계를 차고 있었다. 몇 살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꽤 오랫동안 그는 어떤 시계를 항상 차고 있었다. 부모님이 선물로 주셨다던 시티즌의 시계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친구의 시계는 여전히 잘 가고 있었으나 적지 않은 흠집이 시계에 고스란히 있었다.


내가 시계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2020년 말, 그리고 2021년 초 마지막으로 그 친구를 만났을 때도 그 친구는 그 시티즌의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나는 당시 내가 고친 스와치 시계 말고는 별다른 시계가 없었다. 그때였다. 내가 찬 스와치 시계와 친구가 찬 시티즌 시계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더 비싼 시계를 차야지’하고 생각했다. 그 뒤에 ‘더 좋은 시계, 더 비싼 시계, 더 뽐낼 수 있는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더 많은 시계를 알게 되었다.


그는 항상 유령처럼 출몰한다. 내가 어떤 시계를 차고 있을 때 그가 항상 내 시계를 보고 평가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그 평가에 어떻게 대답해주어야 할지,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시계가 너의 흠집난 시티즌 시계보다 어떤 점에서 나은지 생각한다. 2021년 이후 그와는 연락을 더 이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시계를 좋아하게 된 이유의 절반이 고등학교 때 형에게 받은 시계였다면, 그 나머지는 친구에 대한 질투와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인터넷에는 <시계계급도> 같은 그림이 돌아다닌다. 내가 시티즌 보다 좋은 티쏘(Tissot) 시계를 사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그림을 보고 나서다. 어쨌든 시티즌 보다는 위에 있는 거니까 내가 자랑할 수 있겠지? 그렇게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시계를 즐긴다. 분명 누군가는 더 좋고 더 나은 시계를 찾고, 누군가는 더 좋고 더 나은 시계를 차고. 나 또한 그러한 맥락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가끔씩은 유령같이 떠도는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 시계를 차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 시계가 네 시계보다는 나은거야하고 중얼거리면서. 정작 그 친구에게는 그 시계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 그 흠집은 무엇이었는지, 다른 시계는 무엇을 갖고 싶은지 묻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친구에게 아주 조그마한 감사를 보낸다. 어쨌든 너를 바라보며 생긴 질투와 시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시계를 좋아하게 되었고 여전히 좋아할 생각이란다. 더 이상 너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아주 약간이나마 장수와 번영과 포스가 함께 하길 바란다, 많이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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