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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하고 미련한 독서생활

by pahadi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은 독서 생활에도 딱 들어맞는다. 조상님들은 어쩜 그리 맞는 말만 하셨는지. 표지만 보아서는 모른다.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첫 장부터 한 장 한 장 넘겨 마지막 장까지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다. 이 책과 내가 어떤 운명으로 만났는지.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어보았는데 아직도 제목과 표지만으로 경솔하게 판단하고 내 멋대로 마음 주고 성급하게 실망한다. 오늘도 우연히 마주한 책이 기대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뭐야, 넌?‘ 뾰로통하게 책에게 묻는다.

‘그러는 넌 뭔데?’ 책이 새초롬하게 되묻는다.

몇 장 넘기지 않고 ‘별로’라는 딱지를 붙여버린다. 실망스럽지만 이 책을 고른 시간과 지불한 돈이 아까워서, 애써 넘긴 몇 장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책을 놓지 못한다. 그렇게 미련으로, 오기로 책 장을 넘긴다. 겨우 넘어가던 책 장이 점점 가벼워진다. 넘기고, 넘기고, 또 넘어가며 책 속에 빠져든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내 의지대로라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세상이 열린다. 성급한 오판은 새로운 우연으로 이어지고, 미련으로 걷던 길은 흥미진진한 모험이 된다. 지금까지 이런 우연의 충돌 덕분에 나의 세계가 넓어졌으리라.

오늘 나의 성급함을 칭찬한다. 인생에는 계획으로만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어오는 바람에 우연히 치는 파도에 망설임 없이 올라타 즐겨야 누릴 수 있는 순간들. 그 순간들이 우리의 세계를 재미있게 만든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우리 앞에 펼쳐진 순간들을 정성껏, 자세히 들여다보자고. 깊이 있게, 끝까지. 그렇게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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