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십시오
나름 성실히 연재하고 있는 이 브런치의 최대주주이신 아내님으로부터 민원이 접수되었읍니다.
너무 본인을 미화하는 거 아니냐. 좀 재수 없을라 그런다.
스스로를 막 미화할 생각 없이 담백하게 약간의 MSG만 첨가해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본성인 자기변호와 과거 미화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나 보다. 하긴 내가 임신/육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온 것들을 위주로 글을 쓰다 보니 글 내용만 보면 뭔가 아주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남편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도 게으르고 뻔하고 종종 한심한 그냥 남편이다. 아내와 지인들 말로는 가끔 어처구니없고 속 터지게 하는 캐릭터라고. 여태까지 일견 헌신적이고 훌륭한 남편으로 보일 수도 있었던 글들에 대한 밸런스 패치로 3가지 사건을 소개한다. 소재 선정은 최대주주께서. 참고로 이 글을 포함하여 모든 글은 아내의 검수를 받고 교정을 거친 뒤 발행하고 있으며 어떠한 외압이나 검열은 없었읍니다. 최대주주님 충성충성.
이 해외출장이 바로 앞서 얘기했던 짠짠이 임신 소식을 들은 그 출장이다. 앞의 글에서는 집에 와서 아내가 해준 맛난 밥 먹었다는 훈훈한 내용이었지만 빠진 사건이 있다. 그 날 오전에 귀국하고 집에서 아내와 맛난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말했다.
나: 오늘 밤에 친구들 약속 있는데 가도 돼?
아내: ??? 누군데?
나: 우리 결혼식 사회 봐준 친구가 결혼한대. 결혼 인사 모임인데 예비신부도 온대.
아내: (...) 알았어. 너무 늦지 마.
문제는 항상 디테일이다. "너무"에 대한 해석이 틀려버렸다. 아내는 피곤해서 오후에 잠들었고 그걸 본 나는 왠지 어차피 아내 혼자 자고 쉬고 있을 거, 여유 있게 놀고 와도 된다고 생각했다. 청첩장 받고 예비신부한테 개드립도 잔뜩 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랑 신나게 먹고 마시다 보니 곧 지하철 막차 시간이었다. "너무" 늦으면 안 되니 이제 가야겠다 하고 일어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먼저 일어서면서도 3차 가는 친구들이 부럽더라. 난 그런 인간이다. 2차 가는 길에 "오늘 귀국했다며 안 들어가도 되는 거야?"라고 했던 친구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집에는 약간 화난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 혼자 저녁 먹을 거 뻔히 알면서 좀 일찍 오면 안 되냐. 친구랑 술 먹는 게 그리 좋냐. 너 오늘 임신한 아내를 3주 만에 본 거 알고 있냐. 몸상태 안 좋은 거는 아냐 모르냐. 이런 타박을 듣다가 욱해서 한심한 말을 해버렸다.
아 우리 결혼식 사회 봐준 놈이잖아! 난 친구랑 술도 못 먹냐! 점심 같이 먹고 오후 내내 같이 있었잖아!
짠짠이 31주 차에 있었던 합창단 공연 날 아침, 짠짠이 정기 검사 차 병원에 들렀다가 공연장소인 코엑스로 가느라 집합시간에 늦을 걸로 예상되어 급히 이동 중인 차 안에서.
아내: 카톡방에 그거 왜 그렇게 올렸어?
나: 블로그 내용 캡처해서 보낸 거라 그래~
아내: 사람들이 헷갈릴 수 있으니까 설명 좀 해.
나: 대충 알아보겠지~ 뭐 그런 걸 다 구구절절이 설명해~
이게 뭔 대화인고 하니, 코엑스 주차정보를 공연자 카톡방에 공유했는데 아내는 그게 좀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코멘트를 하라는 거였다. 나는 내가 보기에 별 문제도 없는데 선의로 한 행동이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괜히 삐뚤게 굴었다. 사소한 듯이 투닥거리다 아내가 나를 계속 비난하는 듯이 느껴져서 결국 또 한심한 말을 했다.
아 진짜 말 거지같이 하네!
이건 특정 사건은 아닌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아내를 슬슬 빡치게 한 일. 안정기가 되고 나서 나는 오히려 음주환경(?)이 좋아졌다. 아내가 술을 못 먹으니 지인 모임에 같이 가서 나는 신나게 술 먹고 아내가 운전해서 귀가하는 패턴. 술 안 먹는 사람이 귀가 길 운전을 맡는 것이 합리적이긴 하지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어느새 당연하다는 듯이 같이 놀러 갔다가 아내에게 운전을 맡겼다. 게다가 놀러 가면 내가 항상 늦게까지 놀고 싶어 해서 피곤한 아내가 늦은 시간에 밤 길 운전을 하기가 부지기수. 별 일 없을 때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지만 아내가 컨디션이 나쁘거나 내가 너무 술을 많이 먹든가 하는 날에 아내가 가끔 폭발했다. 본인은 짠짠이 품고 있느라 이런저런 제약이 많은데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이 속 없이 놀아재끼기만 하면 속 터질 만도. 임신한 아내와 산다고 남편까지 금욕생활을 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보조를 맞춰야 하겠다. 뭐든지 적당히가 중요하고 가장 어렵다.
위 사건들의 양상은 제각각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일맥상통한다. 내가 고집부려서 이모양이 되었다. 놀고 싶다고, 대충 하겠다고, 술 먹고 싶다고 고집부리면서 아내를 배려하지 못했다. 게다가 사건 당시, 정확히는 갈등이 벌어진 시점에서 나는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매번. 그 날 생각해보면 정말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내와 냉전을 치르고 하룻밤 자고 나면 후회가 되었다. 그냥 그러지 말 걸. 괜히 고집부리고 말하고 행동해서 엉망이 돼버리고. 항상 비슷한 패턴이었다. 사소한 걸로 아내가 서운함을 표시하면 나는 내 정당함을 피력하고 변호하느라 갈등을 키웠다. 괜한 고집 때문에 나오는 불필요한 말들. 아내와 함께 지낸 10여 년의 시간 동안 반복된 일들이다.
이제야 아주 조금 실마리를 찾았다. 아내가 서운해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1) 아내 이야기를 우선 듣는다.
2) 생각하고 따지고 하는 건 미뤄둔다.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는다.
3) 하룻밤 푹 잔다.
4) 아침 먹고 다시 생각해본다.
5) 준비가 되면 아내와 대화한다.
물론 아직도 아주 잘 되는 건 아니고 아내는 여전히 속이 터져 있을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고 고쳐 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일종의 보조장치를 덧댈 수는 있다. 아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절뚝거리는 나였지만 목발 하나 갖다 쓰다 보면 내 다리처럼 익숙해질 날도 올 것이고 그럼 아내와도 수월하게 발맞춰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산다. 10여 년 동안 고생이 많은 우리 최대주주님에게 감사. 다시 한번 충성충성.
"만행들" 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함정. "육아 기간 동안의 만행들"이라고 나중에 올라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