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6학년, 하교 후에 동네 분식집에서 친구들과 같이 떡볶이를 먹던 날이었을까? 아니면 엄마가 간식으로 해주신 떡볶이를 먹고 있을 때였을까?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떡볶이를 먹고 있었고, 어묵인줄 알고 입에 넣은 흐물거리던 그 물체가 실은 대파조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하며 컵을 찾긴했지만 이전과 달리 바로 뱉어내지 않았다. 씹다보니 은은한 단맛이 나와서 먹을만 했고 곧 떡볶이 양념과 함께 삼켰다. 세상에 파를 먹다니, 처음이었다. 삼키고 생각했다. "파를 먹을 줄 알다니, 나 어른같아." 손에 쥔 컵을 다시 내려놓았다. 열세 살 어느 여름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파 한 조각 먹었다고 열세 살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어른의 세계는 바람에 날리는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처럼 아주 조금씩 눈에 들어오곤 했다.
그 날 이후로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것은 언제였을까? 수십 년 동안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 한 날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오십을 코 앞에 둔 지금도 사실 내가 진짜 어른인가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도대체 어른이 뭐냔 말인가 싶을 때는 두 세번도 넘을거고. 말나온 김에 어른이란 뭘까?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스님, 이어령 선생님 같이 사회가 믿고 따를만한 분만 어른이라고 부르자니 온 세상이 다 아이투성이가 될 거고, 그런다고 법적인 나이로 성인이 되면 다 어른이라고 하자니 욕설을 부르는 모자란 어른들이 또 넘쳐난다.
사실 열세 살에 대파조각을 먹으며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후로 오래도록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력을 가지면 어른이 될 줄 알았지만 여전히 나는 어설프고 서툴렀다. 서른이 되면 도덕적으로도 성숙하고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어른이 될 줄 알았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서른의 나는 사회에서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속은 여전히 아이인 불균형을 극복하는데 힘을 쏟아야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어른'들 말처럼 진짜 어른이 될 줄 알았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키우며 나라는 인간의 바닥을 경험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의 세상을 넓히는데 집중하느라 나의 성숙과 성장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아둥바둥 버티며 긴 터널을 통과해냈다.
아이가 청소년이 된 지금, 작은 아이도 제법 자라서 내 손을 덜 필요로하는 요즘, 다시 어른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떡볶이 속에 든 파를 먹고, 생양파를 춘장에 찍어 먹고, 풋고추와 마늘을 고추장이나 쌈장에 찍어 먹고, 매운 닭발과 함께 독한 술을 들이켜고, 쓴 약과 커다란 알약을 무심히 먹는데도 아직 어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열세 살 때의 시선으로 생각하면 엽떡과 마라탕을 최고 단계 매운 맛으로 먹어도 눈물 흘리지 않으면 충분히 어른일텐데 말이다.
스스로 어른이라고 느낄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지금처럼 고민하는 태도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꼭 필요할거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천천히 어른이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실망하지 않는다. 속으로 '그러려니...'하고 중얼거리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적당한 어른이 되련다. 그러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