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공감하는 캐릭터를 하나 뽑아보고, 그 캐릭터를 활용해 자신을 소개하는 문장을 만들기>>
연수 첫 날, 첫 활동이었다. 순간 강의실 안에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서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다들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턱에 손을 괴고 핸드폰으로 검색까지 해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찾기 시작했다.
나 역시 강사님의 설명을 듣자마자 머릿 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떤 캐릭터도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 읽은 소설들에서 강렬한 인물들은 많았지만 내가 닮고 싶고 오래 사랑한 인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을 떠올렸고,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주인공들이 반짝이며 다가왔다. 피터팬, 톰 소여, 빨간머리 앤, 무민, 삐삐, 주디, 홈즈, 루팡, 둘리, 캔디 등등등등.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이야기속의 인물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행복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래서 어린 시절의 독서경험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주인공, 닮고 싶은 주인공을 골라 종이에 적었다.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이자, 어른들의 세계에 갇히지 않는 소녀. 내가 고른 캐릭터는 바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의 주인공 삐삐였다. 삐삐의 붉은 양갈래 머리와 주근깨를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소개글을 적을 차례였다. 나는 식물을 좋아하니 초록이라는 말을 넣고, 또 다정함을 추구하니 따뜻하다고 표현하자. [나는 초록을 좋아하는 따뜻한 삐삐다.] 문장을 완성하고 간단하게 내 얼굴도 그렸다.
활동을 마무리하고 각자 자신의 캐릭터를 발표하는 순서가 되었다. 나 스스로를 삐삐라고 칭하려니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웃으면서 소개를 마쳤다. 내 소개를 듣고 강사님이 물었다.
"왜 삐삐를 고르셨나요?"
"자유롭고 강하니까요."
"삐삐의 어떤 면을 갖고 싶으신가요?"
"삐삐는 아무도 없이 혼자 지내잖아요. 하아.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이 한 번 지내보고 싶어서요."
강의실 안에 폭소가 터지고 여기저기서 공감의 끄덕거림이 퍼졌다. 강사님이 웃으시며 보충설명을 해주셨다.
"그럼요 사랑하는데 왜 가끔 그러고 싶을 때 있잖아요.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거 다들 아시죠?"
실물은 이 보다 훨씬 귀엽습니다. *-_-*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족이 없으면 내가 제일 곤란할거다. 내가 쓰는 글의 대부분이 가족 얘기니까. 가족이야말로 내 영감의 원천이고 가장 큰 글감이며 자산이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가족을 팔아 글을 쓰는 셈이다. (돈은 나오지 않지만) 그러니 가족 없이 혼자 지내면 글을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집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거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떨어져 있어봐야 소중함을 더 절실히 깨닫는 법이다. 나도 더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떨어져 보고 싶은데, 도대체가 떨어질 일이 없었다. 내게 120%의 깨달음은 과분한 것일까? 100%만 깨달으라는 신의 간섭인걸까?
어쨌거나 가족 덕분에 글을 쓰고 있으니, 가족을 사랑할 이유에 '글감이 되어줌' 이라는 항목을 추가한다. 남편과 아들, 동생과 부모님께 감사하다. 부디, 내 가족들이 내 글을 읽지 않기만을 바랄 뿐.
(대문의 그림은 화가 장욱진의 '가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