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어라 Jul 29. 2024

글감이 되어준 가족에게 이 영광을 바칩니다

수상소감 아닙니다

<<문학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공감하는 캐릭터를 하나 뽑아보고, 그 캐릭터를 활용해 자신을 소개하는 문장을 만들기>>


연수 첫 날, 첫 활동이었다. 순간 강의실 안에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서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다들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턱에 손을 괴고 핸드폰으로 검색까지 해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찾기 시작했다.


나 역시 강사님의 설명을 듣자마자 머릿 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떤 캐릭터도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 읽은 소설들에서 강렬한 인물들은 많았지만 내가 닮고 싶고 오래 사랑한 인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을 떠올렸고,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주인공들이 반짝이며 다가왔다. 피터팬, 톰 소여, 빨간머리 앤, 무민, 삐삐, 주디, 홈즈, 루팡, 둘리, 캔디 등등등등.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이야기속의 인물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행복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래서 어린 시절의 독서경험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주인공, 닮고 싶은 주인공을 골라 종이에 적었다.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이자, 어른들의 세계에 갇히지 않는 소녀. 내가 고른 캐릭터는 바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의 주인공 삐삐였다. 삐삐의 붉은 양갈래 머리와 주근깨를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소개글을 적을 차례였다. 나는 식물을 좋아하니 초록이라는 말을 넣고, 또 다정함을 추구하니 따뜻하다고 표현하자. [나는 초록을 좋아하는 따뜻한 삐삐다.] 문장을 완성하고 간단하게 내 얼굴도 그렸다. 


활동을 마무리하고 각자 자신의 캐릭터를 발표하는 순서가 되었다. 나 스스로를 삐삐라고 칭하려니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웃으면서 소개를 마쳤다. 소개를 듣고 강사님이 물었다.


"왜 삐삐를 고르셨나요?"

"자유롭고 강하니까요."

"삐삐의 어떤 면을 갖고 싶으신가요?"

"삐삐는 아무도 없이 혼자 지내잖아요. 하아.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이 한 번 지내보고 싶어서요."


강의실 안에 폭소가 터지고 여기저기서 공감의 끄덕거림이 퍼졌다. 강사님이 웃으시며 보충설명을 해주셨다.

"그럼요 사랑하는데 왜 가끔 그러고 싶을 때 있잖아요.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거 다들 아시죠?"


실물은 이 보다 훨씬 귀엽습니다. *-_-*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족이 없으면 내가 제일 곤란할거다. 내가 쓰는 글의 대부분이 가족 얘기니까. 가족이야말로 내 영감의 원천이고 가장 큰 글감이며 자산이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자면, 가족을 팔아 글을 쓰는 셈이다. (돈은 나오지 않지만) 그러니 가족 없이 혼자 지내면 글을 쓸 수가 없다. 


하지만 집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거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떨어져 있어봐야 소중함을 더 절실히 깨닫는 법이다. 나도 더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떨어져 보고 싶은데, 도대체가 떨어질 일이 없었다. 내게 120%의 깨달음은 과분한 것일까? 100%만 깨달으라는 신의 간섭인걸까?


어쨌거나 가족 덕분에 글을 쓰고 있으니, 가족을 사랑할 이유에 '글감이 되어줌' 이라는 항목을 추가한다. 남편과 아들, 동생과 부모님께 감사하다. 부디, 내 가족들이 내 글을 읽지 않기만을 바랄 뿐. 


(대문의 그림은 화가 장욱진의 '가족'입니다.) 

이전 05화 유품 아니고 이삿짐 정리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